brunch
매거진 이 사랑

타이타닉 영화 후기를 가장한 러브 레터

by 이가연

타이타닉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배에서 여자의 누드 드로잉이 발견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응..? 여기 얼마 전에 영국에서 누드 드로잉 세션만 두 번하고 온 사람이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에 적어놨는데 어떻게 알았지. 크흠. 연애하면 하고 싶은 것에 써있다. 이거 재밌겠는데, 싶으면서 봤다.

워낙 긴 영화라, 초반부는 거의 다 생략했다. 온전히 두 주인공이 나오는 장면만 봤다. 여주가 아주 불쾌하다며 그만 가야겠다고 말하면서 남주와 악수를 하는데, 그 악수가 한참 이어진다. 괜히 민망한 여주는 역정만 낸다. 여주는 이미 약혼남이 있어서 결혼식에 가는 길이었고, 그러니 남자와 엮이는 게 불편한 일이었고, 여기서 내 미션이 접수됐다. 나는 저 남주에 이입해서 보면 되는구나... 연락하지 말라는 말만 50분 하던 누가 떠올랐다.

그러다 여주는 휙 남주의 스케치북을 뺏어들어 그림을 본다. 이야, 누드 드로잉이다. 내가 누드 드로잉 세션을 그렇게 안 했으면, 움찔하면서 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거 4번 했다고 그새 되게 익숙해졌다. 여주는 남주의 재능을 알아봐준다. 확실해졌다. 남주는 과감하고, 모험심 있고, 예술적이고, 말도 잘한다. 내가 남주다. 다만 남주처럼 집안이 가난하진 않을 뿐이다.

그러고보니 나도, 현실적이고, 내가 보기에 답답하고, 분명 벗어던질 수 있는 사람인데 못 그러고 있는 사람에게 톡톡 튀는 말을 던져주고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는 거 되게 잘할 것 같다. 이 쯤에서 남주 되게 ADHD 기질 있는데 싶어져서 챗GPT에 물어봤다.



역시 몰입될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주가 남주에게 난 약혼했다고,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그러고 영화 상으로 몇 분 안 있다가 남주에게 가서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부럽네. 나는 지금 2년 걸리고 있는데. 하기사 배는 출발한지 나흘 만에 침몰한다.

나는 저 갑판 장면에서 'My Heart Will Go On' 노래가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니 그냥 '아~ 아~'하는 수준에 그치고, 노래는 안 부른다. 그냥 잔잔하고 아름답다.

여주가 "Jack. I'm flying."하는 걸 보고, 버킷리스트에 하나 추가되었다. 많은 여자들이 큰 배 타면 저 타이타닉 장면을 따라하려고 할텐데, 나만큼 구체적으로 생각하진 않겠다. 영화 시작할 때, 단 1초였지만 순간 'Southampton'이라는 단어가 지나가서 쓰읍 했다. 사우스햄튼에서 아일 오브 와이트로 가는 배를 두 번 타봤다. 그 외에도 똑같은 항구에서 출발하는 학교에서 하는 보트 파티도 두 번 가봤다. 그래서 거기서 배 타는 거 꽤나 익숙하고 좋아했다. 타이타닉이랑 똑같이 사우스햄튼에서 출발하는 배 위에서 따라하면 의미 있지 않겠나. 딱 선셋 시간 맞춰서.

갑자기 여자가 자기가 목걸이만 하고 있을테니 그려달란다. 아름다운데, 살짝 걱정이 되긴 하였다. 이 영화는 내가 태어난 해에 나왔는데, 그 시대에는 누드 모델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안 되어있을 때가 아닌가 싶었다. 이성적인 텐션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쓰였기 때문에, 누드 모델이 직업인이라는 인식에 긍정적 영향은 전혀 안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주는 훗날 '가장 에로틱한 순간이었다'라고 회고하기까지 했다.

여담으로, 나는 한 자세당 5분이면 충분하다. 10분까지도 필요없다. 크로키가 좋다.

배가 빙산과 충돌했다. 슬슬 영화를 계속 보기 불편해졌다. 분명 여주는 이 배가 도착하면, 남주와 함께 도망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른 남자와 결혼한 미래를 이미 영화 초반부에서 알려줬다.

(아니 근데 나는 이거 영화 좀 진작 보지... 소튼에 있는 타이타닉 박물관 한 번 더 가고싶게. 아. 혼자 가지 말라는 하늘의 뜻인가. 그러네. 배 타는 목표도 있는데, 그때 박물관도 같이 가면 되겠네.)

답답했던 여주가 점점 용감해졌다. 목숨 걸고 남주를 구하고, 본인이 살 수 있는 상황에서도 남주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 모습을 보인다.

중후반부는 거의 안 보고 다 스킵했다. 그래서 사실상 영화를 봤다고 할 순 없다. 1/3쯤 봤으려나. 여주가 어떻게 살아남는지만 봤다. 구조 요청을 안 하고 그냥 같이 수동적으로 죽으려다가, 여주는 남주가 바라던대로 살아남는다. 결국 여주는 정략 결혼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남주가 여주를 살린 셈이었다. 여주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I don't even have a picture of him. He exists now only in my memory. "라고 회상하며 여주가 말했다. I don't even have a single voice record. 나는 음성 파일 하나 없어. 하는 생각이 들어서 눈물나기 시작했다. 내가 저렇게 사투리를 잘 구사하는 게... 다 왜겠나. 상처 받았던 말이 자꾸 침습한다고 진짜 병이라고 트라우마라고 그렇게 불평했는데, 무의식이 얼마나 노력했던 걸까. 안 잊으려고. 내 마음도 몰라주고 짜증내고 가슴 아파만 했다. 그런데 사진 한 장 있다는 건 역시 하늘이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시련을 준 건가.. 원래 한 번에 싹 지우는 타입이다. 짝사랑이고 연애고 전부 바로 휴지통까지 비운다. 그런데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얼굴이 있는 사진을 하나 남겼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얼굴도 잊어버렸을터.

기회가 많았는데, 이 시점에 이 영화를 보게 만든 것도 하늘의 뜻이다. 만나지 못하고 그 기억으로 평생 살아갈 수도 있다고. 아니다, 그 말은 절대 안 하겠다. 죽음이 갈라놓지 않는 이상 그럴 일 없다. 개인사가 없었으면 이 영화는 그냥 대충대충 넘겨 보다가, 아무 감흥 없이 끝났을 수도 있다.

아, 나도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사람이 되고 싶다. (아. 이미 엄마한테 그러하구나.)

근래 걔 목소리 흐려지는 게 힘들었다... 최면 상담 받았던 8월 15일 이후로, 하루에 몇 번씩 침습이 안 되니, 나도 모르는새 멀어졌다. 예전엔 정말이지 어제 들은 것만큼이나 생생하게 귓가에 울렸다. 이게 진짜 8월까지 그랬다. 그래서 그때마다 심장이 너무 아팠다. 이 아픔은 대체 언제 옅어지는 거냐며 너무 힘들다고 몸부림쳤다. 최면이 그걸 멈추게 해준 것 같아서 좋았다. 이제 된 줄 알았다.

적어도 가장 마지막에 들었던 "니 내 좋아하나"는 언제 떠올라도 심장이 쿵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지금 의식적으로 떠올렸는데 너무 흐려졌다. 흐려지지마 제발. 가장 자주 떠올랐던 말들을 일부러 떠올려봤다. 이제 그렇게까지 가슴도 안 아프고, 안 생생하다. 8월까지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했잖아. 어제 들은 것처럼 심장이 만 갈래로 찢어져서 진짜 정신과 다닐만 하다고 생각했잖아. 이젠 안 찢어져서 문제네..


너무.. 너무 보고 싶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최면에서 봤던 너 (마지막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