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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위로 새겨진 다짐들

by 이가연

다시는 재능 교환 안 찾겠다고 이를 악물어도, 어쩔 수 없이 도파민 결핍과 경제적 결핍이 만나서 계속 찾는다. 오늘은 피아노 재능 교환 글을 올렸다가,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을 올렸더니 어떤 사람이, 자기가 피아노 전공은 아니지만 노래와 영어가 자기도 관심사라며 채팅이 왔다. 그래서 나도 영국에서 보컬 석사를 졸업했다고 소개했다. 그랬더니 멋지네요 한마디와 함께 나이를 묻는다. 바로 차단했다.


한마디에 차단하는 것도 다 그 몇백 명의 경험치에서 왔다. 한 번 봐주면, 두 번째, 세 번째 마디에서 더 열 받게 했기 때문이다. 영어로 처음 만난 사람에게 "How old are you?"하는 게 얼마나 어이가 없는 말인지는 차치하고, 한국 사람이 보기에도 이상한 거 아닌가. 그럼 본인도 무슨 전공을 했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밝혀야할 거 아닌가. 그게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대화다. 과거에는 그런 한국인만 하는 무례한 질문일 때만 차단했는데, 이제는 그냥 자기 얘기 안하고 바로 질문으로 이어가면 차단해버린다. "그럼 한국엔 언제 오셨어요?" 해도 똑같이 차단한다. 그런 대화를 더 이상 조금도 할 수가 없다. 몇마디 더 했다가 '진작 차단할 걸'했던 데이터만 수백 명이다.


분명 그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선언했는데, 왜 또 기분이 나쁜 일이 생겼을까. 첫째는 돈 아끼려다가... 둘째는 내가 가진 재능이 분명 더 쓰일 수 있단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 첫째는 돈 아끼려고를 하지말고, 둘째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미 충분히 하는 것 같다.


올해 처음엔 자작곡 편곡을 위해서 찾았다. 몇 명한테 되게 호되게 데였다. 왜냐하면 그냥 채팅이 아니라 한 번씩 만나고 데였기 때문이다. 쎄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이 한 명, 분노했지만 표현은 못 하고 겨우 차단 눌렀던 사람 한 명, 화내고 차단했던 사람 두 명, 그리고 연락 두절 되어서 삭제했던 사람 한 명 기억이 난다. 진짜 힘들었다. 결국 돈을 주고 건반 한 분과 사촌동생으로 자리 잡았다. 이걸 끈기가 있다고 해야하나,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고 해야하나, 한 명 두 명 그러면 안 해야하는데, 그럴수록 더 찾고 더 찾다가 진짜 마음이 너덜너덜 끝장 나야 접는다. 소개팅도 같은 원리였다. 한 명 만나서 별로였으면 짜증 나니까 바로 다음 사람을 만나던 거다. 그러다 진짜 남자라면 토 나올 때 접었다.


그뒤엔 보컬과 영어 회화 재능교환도 했었다. 하지만 역시, 정말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서서히 연락이 잘 안 되더니, 내가 먼저 연락 안 하니 절대 연락이 안 온다. 그래서 연락처 삭제한지 오래다. 이 분은 걔랑 사주 일주(본질적 성향)가 똑같아서 신경이 쓰인다. 내가 걔 때문에, 상대방이 연락하기 싫은 걸 이번에는 감지하고 알아서 연락 안 했더니 절대 연락 안 오는 게 맞은 건가. 내가 이번에도 눈치 못 채고 계속 연락했으면, 상대방이 싫은 소리를 했을까. 더 상처받았을까. 그런데 그렇게 끊긴 것도 충분히 상처 받은 상태다.


그 정도면 이제 진짜 안할 법도 하다. 하지만 그전까지 나의 목적은, 경제적인 것도 있었지만 음악하는 친구를 사귀고 싶음이 더 컸다. 한국에 음악하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오죽했겠나. 지금은 친구를 사귀고 싶은 게 아니라, 정말 피아노를 몇 분 치지도 않았는데도 손목과 팔이 아파서 이걸 꼭 좀 해결하고 싶은 마음으로 올렸다. 오빠가 훌륭한 피아니스트이지만 영국에 있지 않은가... 내가 사우스햄튼 살았어도 당장 뉴몰든에 가서 "내 좀 도와도!!!"했을 정도로 통증이 좀 심각하다. 이러면 피아노를 치면 안 된다. 노래라고 생각하면 바로 안다. 노래를 10-20분 밖에 안 불렀는데, 노래 부른지 몇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목이 아프다면, 진짜 혼자 노래하면 안 된다. 교정을 받아야 한다.


내가 이미 노래와 영어를 가르쳐줄 줄 아니, 상대방이 피아노나 기타, 드럼과 같은 내가 배우고싶은 악기를 가르쳐줄 수 있다면 얼마나 이상적인가.


하지만 내가 외국어를 돈 주고 배우는 것과 같다. 일본인 친구가 이미 있는데, 그 친구랑 영상통화로 하면 왜 안 되겠는가. 그런데 생각도 안 했다. 친구 시간 맞추기가 어려울 걸 안다. 그럼 생판 모르는 남과는 잘 맞을 것 같은가. 전에 하던 언니도, 내가 그 언니로부터 노래를 배우고 싶은 욕구가, 그 언니가 영어를 배우고 싶은 욕구보다 훨씬 컸던 게 분명하다. 언니는 당장 생계도 힘드니, 계속 미뤄지고 귀찮아지는 거다. 상대방의 욕구가 더 커야한다. 그래서 상대방이 먼저 올린 재능 교환 글이라면, 더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도파민 결핍과 경제적 결핍이 만나서 어쩔 수 없던 현상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더 가벼워진다. 아무쪼록 원하는 걸 다 돈 주고 배울 수 있는 경제력이 생겼으면 좋겠다. 아니다. 이제 당장 영국 갈 생각이 안 드니, 분명 쓸 수 있는 돈이 있다. 꼭 필요한 데에는 투자할 줄 알아야 한다. 피아노는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유명한 가수가 됨에 있어,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부분이다.




"그 다짐을 한다는 건 계시다"라고 한 오빠 말처럼, 올해는 참 정리의 해로 느껴진다. 영국 썩은 동아줄들을 정리하고, 거의 2017, 18년부터 속 썩어오던 '아무나 제발 낯선 사람' 중독도 끊었다. 눈에 보이는 성취가 아니라, 그게 정말 축하할 성취다. 도저히 회복될 기미가 안 보이는 이 상처 위로 새겨진 다짐을, 또 다시 뭔가 행동하게 될 지언정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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