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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by 이가연

방어엔 너무도 큰 이유가 있다. 사람 이름이 붙은 법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고 하지 않은가. 내가 붙인 모든 방어 기준도, 나에겐 사건사고를 거쳐서 생겼다. 그런데 영국은 내가 기껏 피땀눈물로 세운 기준들을, 없애버렸다.


첫째는 무응답에 대한 거다. 친구, 지인이 두 번 메시지를 씹으면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게 카톡은 당연하게 그려진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인데 거기에 세 번 보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메일도 마찬가지다. 이메일은 가뜩이나 한 번 보내는데도 노력이 들기 때문에, 한국인이었으면 한 번 읽음 찍히는데 그친다. 그런데 영국인 교수는 1년 동안 (cc 포함) 열 번은 보냈다. 필히 답장했어야하는 것도 안 했다. 내가 열받아서 형식 안 지켜서 한 번 막 보내고,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서 그 다음엔 제목을 Sorry로 쓴다음에 "Sorry 겠냐? 너한텐 절대 sorry할 일 없을 것이다" 하는 메일 보냈다. 그제야 1년 만에 답장이 왔다. 내가 더 열 받을까봐 읽기 무서워서 영어 읽을 줄 아는 동생에게 읽어달라고 했다. 장문으로 왔는데 미안하단 말이 한 줄은 있다고 했다. 분명 '진심'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배신감이 상당했다.


공연에서부터 이미 거듭 알아차렸다. 한국에서는 무페이 공연에 대한 확고한 기준이 있다. 돈을 못 얻는다면, 최소한 사운드 체크는 하는 공연 환경과 친절한 직원이 있어야 된다. 당연하다. 무페이임에도 불친절한 공연을 한 후에는, 블로그에 글 올려서 그 업체 검색하면 내 블로그가 상단에 뜨게 한 적도 있다. 이건 2021년부터 가만 안 있었다. (당시 나는 제법 파워있는 블로그를 갖고 있었다.)


'어디서든 제발 하게 해주세요.' 자세는 이제 나와 맞지 않거늘, 영국에서는 완전 공연 초창기 시절로 돌아갔다. 영국에서도 똑같이 친절하고 편안한 환경이 아니면 바로 일어서 나올 수 있어야 된다.


공연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제발, '한국이었으면 내가 이 자리에서 일어섰을까' 생각해보면 좋겠다. 영국인은, 사람 생긴 게 다르다고 다른 상황이라고 뇌가 착각하는 모양이다. 아니다. 비슷한 상황 많이 겪었고, 내가 그런 상황에 징글징글하다면, 제발 한국에선 이제 잘 되어있는 것처럼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일어난다고 하고 가라.


한국에서 너무 마음 고생을 해서, 이제 누가 불편하게 한다든가 헛소리를 하면,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그들은 시켜놓은 음료에도 전혀 관심 없고, 용건 끝나셨으면 일어난다하고 아주 당당하게 걸어 나간다. 영국과 영국인도 똑같다. 거기야말로, 외국까지 가서 불편한 상황을 참아주고있을 이유가 없다.


한국이었어도 지금 이 상황을 내가 가만 두나.

저 사람이 한국인이라면 내가 어떨까.


참 가슴 아픈 소리이지만, 외국인에게 저게 적용되어야 산다. 결국 장기적으로는, 영국인에게 더 크게 폭발한다. 훨씬 더 많이 참아서다. 최근에 크게 분노했던 영국인 세 사람은, 진작 작년 여름에 그랬어야 되었다.


결국 더 큰 대가로 돌아온다. 처음부터 내 기준대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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