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완 에세이 / 웅진지식하우스
p48 그 청취자는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1년에 2백 일 이상 해외 출장'을 지목했는데요. 그것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가족 내 문제 중의 아주 일부일 수도 있습니다.
- 저런 상황에서 '아니다 나는 가족과의 시간과 일, 둘 다 똑같이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너무 별로고, '나에게 이 일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더 멋있다. 그 일 잘리면 다른 일 필사적으로 찾을 수 있을 거 아닌가. 꼭 한국에 있을 수밖에 없는, 누군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이면 달랐을 거다. 또한 출장 가서도 일만 하나. 일하지 않는 시간 대부분을 페이스톡 틀어놓고 생활하는 커플들도 있다. 요즘에 보아하니 장거리 커플을 위한 집 안에 돌아다니는 말하는 로봇도 있다. 직접 조종해서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하는 거다.
키가 작아서, 돈이 없어서, 기타 등등 연애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떠오른다. 다 본인 생각이다. 자기보다 키 작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여자들도 있고, 내가 알기론 남자가 키가 작든, 돈이 없든, 직업이 뭐든 다 상관 안 하는데 남자 본인이 열등감 있으면 너무 싫다는 여자가 훨씬 많다. 많은 사람들이 진짜 문제의 본질을 잘 모른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p92 방송국에 오면서 아기 목욕물처럼 미지근한 공기를 스치다 보니 '지나간 계절이 있구나. 뭐가 그렇게 부끄러웠는지 봄은 인사도 없이 가버렸구나.' 했습니다.
- 어쩜 이렇게 시처럼 글을 쓰셨을까. 올해가 벌써 끝이 보인다. 다만 나는 원체 한 해에도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는지라, 남들처럼 한 해가 빨리 갔다는 말에는 매번 잘 공감이 안 되긴 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제때 즐길 거 즐기고 잘 보낸 거 같다. 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이 들어봐라'라고 하겠다만, 20대 초반에 20대 후반들에게 듣던 소리 아직도 공감 안 된다. 난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 같다. 세월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 것처럼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젊었을 때보다 인생 버라이어티가 줄었다는 뜻인데, ADHD 인생이 그럴 리 없다. 나에게 생각만 해도 아린 지나간 계절은 2023년 가을이다. 벌써 2년 전이다. 근데 나한테는 체감 3-4년이다. 문득 또 걔 마지막으로 보고 한참을 쇼핑몰에서 발걸음을 못 뗐던 기억이 났다. 난 아무래도 직감이 확실히 있는 사람이다. 이런 반 무당 같으니.
p95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면 씻기도 전에 기타부터 잡을 때가 많습니다. 요즘 들어 왜 그렇게 기타가 좋은지, 진즉 기타의 참맛을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없지 않지만 지금 이대로도 좋아요. 말 그대로 반려가 되는 것 같아요.
- 나도 그런 악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부른다만, 매일 피아노가 치고 싶을 정도는 아니다. 막 너무 좋은 악기는 없다. 어릴 땐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어릴 때는 '못하게 해서' 그랬던 거다. 지금은 못하게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런가. 그렇지만 노래는 못하게 하는 사람 없어도 계속 좋아하잖아. 아직 나에게 맞는 악기를 못 찾았을 수도 있다. 세상에 얼마나 악기가 많은데. 돈만 있으면 바이올린, 첼로, 베이스, 마림바 다 해보고 싶다.
p101 오늘 아침에도 집에서 싸 온 김밥을 꾸역꾸역 먹는데 아닌 게 아니라 목이 메더라고요. 목구멍이 뻑뻑해서 잘 안 넘어가요. 보온병에 담아 온 따뜻한 물을 마시는데 몸도 훈훈해지고 목도 부드럽고 좋아요. 그때 많이 들었던 익숙한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천천히 먹어라. 물도 마시면서." 우리가 살면서 수없이 많은 말을 하고 또 듣잖아요. 수많은 단어를 암기하고 머리에 쑤셔 넣듯이 공식을 외우고. 그런 모든 말 중에 체온이 담긴 말이 몇 마디나 될까요?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잔소리로 들렸던 어른들 말 빼면.
- 마카오 갔을 때 걔 잔소리 귓가에 들렸던 거 생각났다. 나한테 감히 잔소리하는 친구가 없었다. 누가 친구 사이에 잔소리를 하나. 걔도 웃기는 애였다. 근데 잔소리를 안 한단 건, 그만큼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고,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다. 나는 걔가 잔소리해서 좋아했던 게 틀림없다. 잔소리하는 장면이 계속 떠오르는 것에 징글징글해하면서도, 무의식이 즐기니 일어나는 일이다. 마음을 느꼈으니까. 마음을 느끼니까.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지금조차도. 억지로 막 상상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같이 옆에 있는 것마냥 팍 하고 치니, 나는 이 영적인 연결을 믿을 수밖에 없다.
p110 얼마 전 제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동영상에 달린 댓글을 봤어요. 관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려고 연주하는 것 같다고 하기도 하고, 글렌 굴드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피아노가 이 사람을 연주하는 것 같다는 댓글도 있었어요.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그 누구 아닌 자신을 위해 인생을 연주해 보세요.
- 최근 들어, 타로가 일이 되니 나를 위해서 타로 보는 시간과 여유가 확 줄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번 주에 결심했다. 남을 위한 유튜브 타로 영상은 주중에 찍고, 주말에는 나를 위한 타로를 보기로. (물론 개인 상담이 들어온다면 주말에도 찍겠지만) 적어도 주말에 유튜브 신경은 끄기로 다짐했다. 7일 내내 유튜브 생각만 하니 여간 피곤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사람들을 위해 '상대방 속마음' 영상을 찍을 때... 이거 다 걔 속마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영적인 관점에서 당연하다. 내가 만드는 영상이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영상 찍고 검토도 안 하고 그냥 바로 올리는데, 간간히 제삼자 관점에서 내 영상을 듣는다고 생각하고 봐줘도 좋겠다. 나를 위해.
p124 기다리는 시간이야말로 내가 오로지 나하고만 있는 시간입니다. 기다림은 지금의 나와 또 다른 나 사이의 다리가 아닐는지.
- 아 나와의 시간 정말 충분히 알차고 멋지게 잘 보낸 거 같은데. 그래도 2026년의 나 사이에 있는 지금의 나를 아껴주겠다. 지금의 내가 되느라 너무 수고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