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휴가처럼

by 이가연

문득 또 영국에선 얼마나 돈 생각 안 하고 돈을 잘 썼나 떠올랐다. 한국 돈으로 환산도 잘 안 했다. 먹는 건 어차피 먹는 거니까 다 아낌없이 사고, 어디 갈 데도 '어휴 또 당일치기 여행 가면 돈 많이 들겠네'라는 생각을 일절 안 했다. 런던 한 번 갈 때마다 거의 20만 원씩 썼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 달에 한 번씩 런던 안 가면 답답해 디지겠다고 꼬박꼬박 갔다. 엄마가 용돈으로 한 달에 150만 원씩 줬는데, 원래 가지고 있던 돈 깎아먹으면서 더 쓴 것으로 기억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근교 여행을 가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그 도시에서 못 살겠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지금 어떤가. 교통비조차도 한 달에 3-4만 원 나온다. 서울은 딱히.. 가고 싶은 곳이 없다. 도파민이 안 나온다. '오늘은 도서관 갈래, 서점 갈래?' 할 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 돈을 쓰는 데에 있어서 나를 가두고, 억제하고, 통제하는 수준을 보아하면, 한국이라 답답한 게 아니라 내 마인드셋이 다르다. 8천 원짜리 밀크티 마시면서도 '돈 쓰면 안 되는데...' 한다.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 사 먹고 들어올 수도 있는 법인데, '집에 먹을 거 있는데 괜히 돈을 쓰냐.' 싶다. 얼마 전에 영상 편집 AI 구독이 겨우 6,900원 하는데도 며칠을 고민하고 했다. 그런 강박이 모여, 그런 날들이 모여, 갑자기 비행기표 지르는 거 아니냐!!!!!!


'여행 가서 힘들어만 하면서 자꾸 돈만 써.'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해결책은 거기에 있지 않다. '어떻게 하면 혼자 여행을 잘할 수 있을까'에는 이미 많은 노력을 했다. 걸어 다니면서 쉬려고 그림 일기도 가져가고, 카메라 켜고 브이로그 찍고 할 만큼 했다. 피곤한 것만 문제가 아니라, 이제 어딜 혼자 가도 재미가 없다. 재미가 없기 때문에 도파민이 덜 나와서 매우 힘들기만 한 것이다...


일상 속에서 돈을 좀 써야 한다. 어차피 나는 물건이 아니라, 즐거움을 산다. 다 경험을 사는 행위다. 지금 가장 돈 쓰고 싶은 분야가 뭔가 배우는 거라면, 그건 투자고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하루하루 일상이 휴가 같아야 한다.


마음 같아선 한 달에 몇십 만원씩 누가 공부하라고 편하게 돈을 줬으면 좋겠다... 물론 지금도 엄마가 프랑스어 학원비는 주셨다. 그런데 엄마도 돈 없다고 한숨 쉬고, 그걸로 내 마음이 전혀 차지 않는다.. 사주, 타로, 점성학도 아직 한참 더 배워야 하고, 심리학 자격증도 따고 싶다. 그건 앞으로 내 직업이 되기 때문에 필수로 할 예정이고, 진짜 여유가 있다면 싱잉볼 명상이나 꽃꽂이도 다니고 싶고, 독립 출판 워크숍도 몇 년째 찾아만 보고 돈 때문에 고민되어 안 했는데 하고 싶고, 드럼도 전부터 너무 배우고 싶다. 배움에 대한 욕구가 항상 있었는데, 나중에 갑자기 해외 나가고 싶어질 때 돈 써야 한다고 미뤄왔다.


그런데 잠깐 달리 생각하면 되는 일이었다. 갑자기 해외 나가고 싶은 마음이 안 들게 환경을 조성해 주면 된다. 혼자 휙 떠나봤자 돈만 쓰고, 발 아프고, 마음 힘들다는 걸 상당히 느낀 올해였다. 진심으로 원해서 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가 답답하고 심리적 감옥 같기 때문에 참다 참다 가던 것이니, 충분히 바꿔줄 수 있다. 오빠가 거듭 '너는 영국을 좋아하지 않아'라고 했다. 작년 하반기부터 올해 초까지 하도 사람들이 다시 영국 가서 살아야하는 거 아니냐고 너무 이해를 못하고 오빠만 이해해서 힘들어했다. 남이 나를 너무 이해를 못해줬던 기억에 짜증이 확 나는 건, 결국 내가 나를 이해 못해줬던 게 화가 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이렇게까지 몰라줬음에 화가 난다.




내년은 더욱 배움의 시간이 될 거다. 근래 이미 잘해오고 있었다. 사실 24, 25일 혼자 창원 가려고 기차표를 알아봤다가 접었다. 대신 창원 가려던 거 누른 보상으로 타로에 투자했다. 몇 년 전부터 계속 배우고 싶던 덱 수강 신청했다. 1박 2일 갔다 오는 것보다 조금은 더 비싸긴 하지만, 훨씬 더 오래 남을 가치다. 한 번 배워두면 계속 쓴다.


찾아보니 문화센터 수업은 상당히 저렴하다. 1월에는 문화센터 수강 신청도 하려고 두근두근하며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배우고 싶은 거면 그게 한 100만 원 하는 것도 아니고, 진심으로 원한다면 그 마음 누르지 않고 다 할 거다. 지금까지 눌러온 게 너무 많다. 독이 되었다. 그걸 누르지 않고 다 배우고 즐겼다면, 9월에 영국도 안 가고, 11월에 마카오도 안 갔다. 그렇게 생각하니 매우 바보 같다... 오히려 돈을 더 쓴 꼴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제대로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나에게 좀 더 용기를 주자면, 보통 사람들이 깨닫기 어려운 거 이미 작년과 올해 많이 깨달았다. 한 달 한 달이 다른 사람 같다. 이미 나의 강점과 약점, 진로, 사랑,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잘 파악했고, 이제 경제적인 부분까지 왔다.


지금껏 여행 말고 일상 속에서 돈 쓸 일이 거의 없었다. 과거 가계부를 쓴 적이 있다. 단순히 수입과 지출을 적는 게 아니라, 지출 중에서 좋았던 지출에 밑줄을 쳤다. 그러니 가계부 보면서 한숨을 쉬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이런 데다가는 돈 쓰는 게 좋구나 느꼈다. 최근에는 애초에 지출이 거의 없으니 가계부를 안 썼다. 다시 쓰기 시작해야겠다. 그리고 희한한 목표도 세우겠다. 한 달에 50만 원은 마음 놓고 나에게 '투자'할 거다. 보통 줄이려 노력하겠지만, 나는 늘려야 된다. 전시회, 공연 관람, 원데이 클래스 수강 이런 게 다 투자다.


20대 여자가 교통비랑 핸드폰비 밖에 거의 안 나온다는 건 자랑이 아니라...... 히키코모리다....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너 왜 이렇게 또 돈 쓰려다가 말아? 그러다 비행기표 질러야 정신 차릴래?'하고 윽박지르진 않겠다. 가끔 가만 보면, 내 안에 군인이 사는 거 같다. 너무 스스로에게 친절하지 못하다.


지금까지는 나에게 해가 되는 걸 열심히 끊어냈다. 인간관계를 끊고, 일을 끊고, 내 한계선을 세웠다. 그럼 이제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넣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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