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파트에 살 자격

by 이가연

이 집은 한 달 관리비가 100만 원 가까이 나온다. 여기 사는 사람은, 아파트 헬스장이 문을 닫았다고 하면 충분히 근처 다른 더 좋은 헬스장 가도 된다. 추가로 헬스장 지출이 생긴다고 한들, '한 달에 뭐 몇 만 원 더 나간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집 문 앞에 파일에 껴있는 프린트물을 발견했다.



아파트 주민 일동도 아니고 '아파트 주민입니다'라고 적혀있다. '지금 시방 이걸 혼자 쓰고, 프린트해서 돌렸단 말여?' 싶었다. (외할머니가 충청도)


다른 동까지 돌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동만 해도 39층에 4호까지 있어서, 총 156호다. 다른 동은 출입이 불가하니 이 동만 돌렸다고 쳐도, 156개를 프린트해서 스테이플러로 집고 또 156개의 파일에 넣고 39층부터 하나하나 다 문 옆에 두고 간 거 아닌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가 보다'하고 넘긴다. 트레이너들이 갑자기 잘렸다고 한들 '안타깝네.. 너무하네..'하고 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낀다. 더 나아가서 항의할 수는 있다. 그런데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고 들으면 그냥 포기하기 쉽다.


영국 기숙사 살 때 떠올랐다. 기숙사 프런트는 수십 번을 이야기해도 옆방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았고, 그동안의 이메일 pdf 따서 본사에 찔러 넣었는데도 똑같았다. 학교에 얘기해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정말 할 수 있는 걸 다했다고 생각했다. 주의를 주면 뭐 하나 말을 안 듣는 걸. 시큐가 한 번 방에서 대마 냄새나는 거 현장 적발할 때마다 벌금 50파운드씩 때리게 하는 규칙을 만들자고 전 기숙사 방에 종이를 돌릴 순 없었나. 나도 저렇게 서명받아가지고 규칙 만들자고 할 순 없었나. 난 내 상식 선에서 할 수 있는 걸 미친 듯이 다했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얘기했더니, 프런트는 일 안 할 수 있다고 본사에 찌르라고 해서 그렇게도 했고, 경찰에 신고까지 했었는데.




왜 저렇게 글을 쓰게 되셨는지 너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글을 잘 쓰셨다. 처음에 핵심 딱 던지고, 이게 왜 문제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그래서 뭘 원하는지 명확하게 적혀있다. '그래서 우리 개개인은 뭘 어떻게 해야 한단 거지?'라는 물음에도 '입주자대표회의가 열리게 되면 많은 관심과 참여해 달라'라고 답해져 있다.


'현재 이용하지 않는 세대 역시 언제든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잃게 된다'라... 이사 온 지 1년 됐는데, 헬스장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다시 재개가 된다면 꼭 가보겠습니다.


저 두 장의 프린트물에 깊은 영감을 받았다. 저 정도 수준이 되어야 나중에 내 돈 주고 이 정도 아파트에 살 수 있겠구나! 지금은 내 능력으로 이 집에 사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의지가 솟았다.


이런 걸 보고 그냥 넘기지 않고, 이렇게 영감을 받고 글을 쓸 정도의 나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이사 왔을 때, 아침 8-9시마다 매일 5분씩 러닝머신 뛰는 소리가 났다. 엄마는 어차피 5분인데 그냥 넘어가라고 했다. 근데 나만 싫은 게 아니라, 엄마도 싫은데 짧으니까 그냥 참던 거다. 아무리 5분이라 해도, 어찌 기분 좋게 시작해야 할 아침에 매일 조금이라도 뭔가 참아야 할 상황을 내버려 둘 수 있나. 윗집에서 자기네가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소음의 원인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쪽지를 붙였고, 바~로 조용해졌다. 그 사람은 그냥 자기가 뛰는 게 안 들릴 거라고 생각했던 거다. 몰라서 그런 사람일 수 있으니, 알려주는 게 맞았다.


나도 이미 저 글을 쓴 사람처럼, 내 권리를 지키며 멋지게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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