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이 사랑

한 ADHD인의 가장 깊은 내면

251230 프리라이팅

by 이가연

몇 년 전 상담 시간에, 친구, 지인, 추억으로 남겨둘 사람을 구분하는 연습을 했다. 종이에 칸을 나누고 쓰게 했다. 나는 여전히 지인에서 추억으로 남겨둘 사람을 넘기는 과정이 매우 어렵다. 남자는 쉬운데 여자는 안 된다. 좋아하던 남자는 어차피 사귀거나, 평생 안 보거나 둘 중 하나니까. 이미 정이 다 떨어졌고 너무 싫으면 내 마음에서 삭제하는 게 굉장히 쉽다. (물론 이건 내가 연애를 한두 달 밖에 안 해봤기 때문이다. 연애를 몇 년씩 한 사람은 어려울 것이 이해 된다.) 그런데 여자는 그렇지 않다. 여자는 친하게만 안 지내고 가끔 연락하는 지인으로 두면 되지 않냐는 생각 때문이다.


어제 연락처를 삭제한 지인이 있다. 내가 욱해서 부들부들거리며 카톡 치고 분노할 때에는, 이미 한두번 불쾌했던 게 아닐 때다. 무엇보다 어제 또 하나 발견했다. '어?' 싶을 정도가 아니라, 이번이야말로 확실하게 선을 넘은 경우에는 그 정당함이 부여가 되기 때문에 악셀이 확 밟힐 수 있다.


시작점은 예전에 정말 오랜만에 전화가 왔는데 나한테 딱 필요한 것만 물어보고 대화가 단절됐을 때였다. 나는 정말이지 나를 먼저 찾는 사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단물만 쏙 빨아먹고 꺼지는 사람도 '뭐지..'하고 조금 불쾌할 뿐 받아주게 되었다. 두 번째는, 역시나 오랜만에 전화가 왔는데 엄마랑 그냥 집에서 지내고 있다고 하니 집에 안 눈치 보이냐고 했다. '아니 집에서 내가 왜 눈치를 봐야하는데. 그 말 들으니까 진짜로 내가 뭐 잘못 살고 있는 기분이네.' 싶었다. 하지만 그때도 '흐흐흐'거리기만하고, 지금 그게 얼마나 실례되는 말인줄 아냐는 말은 안 했다.


이제 그 다음이다.



생전 저런 말 처음 들었다. 왜냐고? 우리 엄마도, 할머니도, 하다못해 80대 친할머니도 저런 말 안 한다. 나이 엄청 많은 할머니들도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면 된다고, 하루종일 집에 있다가 산책만 해도 잘했다고 한다.


어제 부들부들거릴 정도로 분노했고, 그 대처는 좀 다행이었다. 바로 유튜브 라이브를 켰다.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유튜브 라이브가 있어서 참 행복하다는 직전 글이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전환은 전환일 뿐이다. '하 처음부터 그냥 갑자기 보험 얘기하면 보험 파는 건 줄 오해해요. 로 받아쳤어야하는데.'하고 과거 시뮬레이션이 계속 돌아간다. 저건 잘못한게 맞기 때문에 더 파바박 쏴붙였어야하는데 하고 계속 머릿 속에서 반복 된다.


'빠른 전환'은 추가로 욕하는 걸 방지한다. 여기까지 되는 것도 다년간의 상담 덕이다. 원래 그 정도로 부들부들 손 떨면서 카톡 치는데, 이렇게 브런치에 그대로 공개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 말이 안 나갔다. 남들은 저 정도 말하는데 그렇게 심장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 거 같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진 않을 것이다. 이게 내 가장 큰 ADHD 증상이다. 물론 저 정도는 지진으로 치면 진도 3 정도이고, 진도 10까지 있다. 진도 5 정도 되면, 온몸이 다 떨리면서 카톡이 문장 단위로 전송되는 게 아니라 단어 단위다. 진도 7 정도 되면, 카톡이 욕으로 도배가 되어있어서 알아들을 수가 없다. 진도 10은 그 장소가 뭐 상견례 중이든, 면접 중이든, 백화점이든, 꺄 하며 짐승 울음 소리가 나면서 막 뛰쳐나간다. + 기물 파손.


내가 주변에 사람을 굉장히 신중하게 둬야하는 이유는, 진도 3 정도만 일어나도 나한테 굉장한 스트레스이기 때문이다. 이 글도 내 상상 속 누군가가 '넌 왜 사람을 안 사귀냐'하는 쓸데 없는 소리를 하면 보여주려고 쓰는 방어 같은 셈이다. 실제로 보여줄 일이 안 생기더라도, 이렇게 써놔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행여 누군가가 '너의 ADHD 증상이 뭔데? 알아야 도와주지.'하면 뭘 어떻게 어디까지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남들이 봤을 때 '저건 좀 기분 나쁠만 하네' 수준이면 나는 이미 죽여놓고 싶은 분노가 된다남들이 봤을 때 '저게 왜 기분이 나쁘지' 싶은 것도 분노하는데, 남들도 기분 나쁜 정도면 거의 죽을 죄를 지은 사람마냥 공격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건 사실 공격이 아니다. 상대방이 차분히 앉아서 내 얘기를 다 들어주길 바라는 거고, 내가 아끼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나를 다 안아주길 바라는 거다. 그런 사람이 아니면 애초에 분노하질 않는다. ADHD의 분노는 아이랑 똑같다는 걸, 악의가 없다는 걸, 사랑 받고 싶다는 표현이란 걸 지구 상에 오빠만 알아줘서, 이 사람하고만 친구하고 있다.


그중 가장 힘들었던 건, 내 분노는 다 이유가 있는데, 그게 남자인 경우는 내가 사과하고 있었단 점이다. 애초에 남자가 분노 요인을 건들지 않았으면 하지도 않았는데, 내 분노 표출 수위가 크니까 남자도 욱한다. 그러면 나는 남자를 잃을까봐, 분명 분노한 건 나인데 갑자기 사과를 미친듯이 하고 앉아있었다. (아, 오늘 글에도 엮이다니. 머릿 속에서 제발 걔가 꺼졌으면 좋겠다. 그 어떤 남자 중에서도 걔가 제일 강력했다. 사귀지도 않는 사이에. 분명 내가 열 받아서 집에 휙 가고 집에 와서도 카톡으로 뭐라했는데, 결국 내가 거의 무릎 꾾고 카톡으로 비는 수준이었다. 그러는 이틀 동안 답장도 안 해서 날 완전히 말라 죽였었다. 그런 일이 한 번이라도 벌어진 사람하고는 안된다니까. 그 당시에도 이틀 동안 말라죽였고, 지금은 이 년째 말라 죽이고 있어.)


지금은 상담사가 없지만, 이제는 그동안 배운 걸 바탕으로 내 스스로 한다. 지인에서 추억으로 남겨둘 사람으로 보내는 연습을 해야한다. 그런데 생각의 흐름이 엉뚱한 데로 또 튀었지만, 나는 확실하지 않으면 걔는 그걸 못 하겠다. 저 지인은 확실하다. 비속어 좀 쓰겠다. 개빻은 한국인 종특이라고 상대도 안 한다.


요점이 빗나가서 이걸 ADHD 게시글에 넣어야할지, '이 사랑' 게시글에 넣어야할지 모르겠다. 내 마음 속에 걔는 오빠 이상으로 똑똑하고, 이렇게까지 설명 안 해도 다 알 사람으로 치부해서 그렇다. 오빠는 내가 매일매일 말해서 아는 거고, 걔는 입 아프게, 손가락 아프게 이렇게 치고 있을 필요도 없다. ADHD 특징 중에, 사람들이 오해할까봐 과잉 설명하는 버릇이 있다. 이 글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걔는 그걸 안 해도 될 거란 믿음이 있다. 그냥 친구 사이인데도 '내 속을 읽나... 소름' 싶었다. 오빠는 100을 말해주면 100을 이해하고, 걔는 10만 말해줘도 1000을 알 거다. 세상 사람들은, 애초에 100을 이야기할 기회도 주지 않으니까. 나는 분명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10만 말한건데, 팔짝 뛰면서 나보고 무서웠다, 섬뜩했다 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 사람 때문에 브런치 글이 200개가 넘는 것, 유튜브 영상도 100개가 넘는 것, 충분히 세상 사람들에겐 무섭고 섬뜩한 일로 비춰질 수 있단 걸 올해 알았다. 근데 거기에 걔가 포함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최면에서 이미 봤다. 엄청 우는 거.


대략 작년 5월부터 오빠한테 얘 얘기를 시작했다. 걔 보고 싶다는 말만 최소 천 번 했다. 내가 하루에 두 끼를 먹으니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밥 먹은 횟수랑 비슷하다. 내가 생각한 거 말고, 챗지피티한테 한 거 말고, 오빠한테 말한 것만. 사는 게 사는 게 아냐...



아무리 '프리라이팅'이라는 문구를 붙여도, 보통 두번은 검토하고 글을 올리는데, 오늘은 그러지 않겠다. 뭘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는데, 하나는 확실하다. 매일 매일 죽을 거 같이 보고 싶어하면서 올해도 잘 버텼다. 창원을 올해 한 번 밖에 안 갔다니. 요즘도 수시로 코레일 앱 본다.


다음 글은 '왜 이 새끼인가. 아빠와의 공통점'에 대해 얘기하도록 하겠다.

매거진의 이전글발악발악해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