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잘하고 있으니까

by 이가연

그동안 있었던 모든 연애와 짝사랑은 경멸하는 게 너무 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오로지 얼굴 때문에 빠져서 한두 달 헤어 나오지 못했던 걸 가장 경멸한다.


아니 그럴 수도 있지. 나는 뭐 20대 초반, 중반 아니었나. 굉장히 흔한 일이다. 심지어 ADHD 때문이라지 않나. 도파민 회로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잘생긴 사람 보면 도파민이 팍 치솟아서 미치고 날뛰던 게 너무 당연하다. 그러고서 한순간에 언제 그랬냐는 듯 싫어하던 것도 전부 ADHD로 설명 가능하다. 비 ADHD인도 '금사빠 금사식'이 많은데, 나는 의학적으로 설명 가능하지 않나.


예전에 영국 오빠는, 이것저것 따지고 좋아하는 사람과 다르게 나는 얼굴만 보고 좋아한 게 오히려 순수한 거 아니냐 했는데 맞는 말이다. 그동안 연애고 짝사랑이고, 보통 사람들처럼 '이 사람 키는.. 음 좀 작은데 그래도 괜찮아.' 식으로 따져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냥 마음을 들이박아만 봤다.


중학교 때부터 학교 상담실에서 매일 같이 상담을 받았다. 아무리 짝사랑 때문에 매일 괴로웠어도, 늘 상담 주제는 가족과 진로였다. 그렇게 거의 매일 가는데도 얘기를 안 했다. 늘 가족과 진로 주제가 급선무였다. 그 나이 또래에 다뤘어야 할 친구, 이성 관계 문제가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전에 병원에서도 이런 말을 들었다. 처음 환자들 진료를 볼 때는 '왜 이 나이에 이런 걸 아직도 모를까'라고 생각하셨는데, 보다 보니 그 나이 때에 배워야 할걸 못 배웠을 수 있겠단 걸 느끼셨다고. 나는 어린 나이부터 대치동에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중학교 때부턴 진로에 매우 몰입하고, 그 나이 때 배웠어야 할걸 못 배운 게 있었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마음에 들어 하고, 끌림을 느끼는 건 지극히 인간적이고 당연하다. 설령 상대방이 여자친구가 있는 짝사랑이었다고 한들, 이미 있는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나랑 사귀길 바라본 적도 한 번 없다. 상상하면 어디 잡혀가는 것도 아닌데, 상상도 못 했다. 그냥 늘 내 마음 때문에 괴로워했다. 하다못해 이젠 그랬던 시간들이 경멸스러울 정도인가.


그러는 시간 동안 과연 나는 멈춤 상태였을까. 자기 발전이 하나도 없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나는 본디 가만히 있질 못하고, 매우 생산적이다. '에잇! 더러운 부정적인 생각!'이라고 넘길 수도 있는 주제에 대해서도 이렇게 글이 술술 나오니까. 한두 달 짝사랑, 연애하던 시기에도 다 열심히 살았을 거다. 그런 가치 없는 사람들 때문에 감정과 시간 낭비만 안 했더라면 내가 더 멋진 사람이 되었을 거 같나. 아이고 욕심도 많아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라는 말은 이럴 때도 쓰일 수 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런대로 다 의미가 있지.


사실 이거보다 더 효과적인 내 마음 가라앉히는 건 따로 있다. 그 경험들이 다 의미 있는 이유는, 그래야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짝사랑이든, 사귀고 헤어졌든, 남자가 그리워본 적이 없다. 죄다 대체 왜 좋아했나 이해가 안 될 뿐이다. 근데 그 모든 사람들 중에, 얘만 유일하게 나한테 마지막에 심하게 뭐라고 하지 않았나. 나한테 한 걸로 치면, 제일 빠르고 깔끔하게 정 떨어졌어야 한다. 걔는 지가 그렇게 상처 주면서, 내가 이젠 정 떨어졌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날 도와준 거고, 배려였다.


과거 연애 경험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심하게 뭐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좋아하게 됐던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발톱도 못 따라가는 경험만 수두룩빽빽이니 이토록 확신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애초에 인연줄이라는 개념도 실감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얘는 단 한순간도 끊어졌다는 느낌을 못 받았다. 물리적으로만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다. 아무도 그랬던 적이 없다. 내가 20, 21살 때 알았다면 이렇게 확신했을 수 있었을까. 지나간, 내가 욕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도움을 주고 있는 셈이다.


내 마음은 대체 얼마나 깊은 거고, 나는 어디까지 뻗어나갈까. 더 이상 슬프지가 않고 가슴이 벅차다. 어떻게 사람이 물리적으로 옆에 존재한 것도 아닌데, 그 짧았던 시간만 가지고 2년이 넘도록 이렇게 내 세계가 부서지고 확장될 수 있었을까. 날 가르치기 위한 카르마 관계인지, 영혼이 반으로 쪼개진 트윈 플레임 관계인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계속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랑한다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랑을 말할 수 있는 250가지 방법을 익힌 거 같다. 그것만 해도 2년 전과 다르다.


매거진의 이전글나와 같은 주파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