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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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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연 Nov 12. 2024

3. 안 망했어

하지만 신찬성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이번에 무당 언니를 찾은 이유는 학업도 커리어 때문도 아닌, 오로지 김현우 때문이었다. 무당 언니에게 전화를 걸자마자, 요즘 마음에 가는 사람이 있는데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 사람 지금 안 좋은데... 상황이 좋지 않아.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지만 있는 거 같은 느낌이 아닌데.”

“지금 유학 중이라 떨어져 있어서 그런가 봐요.”

“안 좋아. 안 좋아. 이별수가 들었어. 이건 헤어질 수도 있는 거지. 이걸 잘 넘기면 계속 만나는 거고, 못 넘기면 헤어지는 거고.”

“어후.”

“그냥 친해져 봐. 이 사람은 그냥 편안하게, 정말 편안하게 친구로 가야지.”  


마침 신찬성도 김현우와 동갑이기도 하고, 원체 아싸 기질이 다분한 건축학도라 인싸인 김현우와 친해지고 싶은 듯 보였다. 둘 다 김현우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같으니, 셋이서 편안하게 만나기 좋다고 생각했다. 신찬성 역시 현우가 시간이 되는지 물어보라고 했다.


오빠 이번 주말에 찬성 오빠랑 같이 만나실래요? ㅎㅎ 저 이번에 새로운 카드 샀는데 들고 갈게요.


이번 주말은 내가 안 되네ㅜㅜ 다음에 보자!


누가 봐도 인싸인 분이 당장 이번 주말에 시간이 되실 리 없었다. 나나 신찬성 같은 사람들이나 집에 있지. 물어본 내 잘못이었다. 머리로는 아니라고 늘 외쳤다. 그럼에도 그 이후로도 신찬성에게 먼저 시간이 되는지 물어보고 김현우에게 연락하기를 두 번을 더 반복했다.          


그다음 무당 언니와 통화할 때였다.


“아이고... 편안하게 친구로 가라고 했더니만.”

“왜요 왜요? 티 났나요?”

“이거를... 한 1에서 100까지 있다고 하면, 티가 10만 났어야 하는데. 지금 20이 났네.”

“헐 그럼 어떡해요. 으악.”

“편한 친구가 되었어야 되는데. 원체 훅 하고 빠져드는 스타일이라서 그래 우리 사랑 씨가. 한 번 마음이 가면.”

“아이고... 망했네요..”

“아냐 안 망했어. 망한 건 없어.”

“제가 막 만나자고 했거든요. 엊그제도 만나자고 했는데 주말에 바쁘다고 거절당하고. 다 거절했어요. 부담스러웠을까요?”

“부담스럽다기엔.. 이 사람도 이 사람 나름대로 할 일도 많고 사람도 많아서 신경 쓸 여력도 없어.”     


들켰구나. 그럼 그렇지. 이건 내 고질병이다. 그 주체할 수 없는 마음과 에너지는 곡에만 쏟아야 한다.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만 발휘해야 한다. 내가 마음 느끼는 대로 고스란히 사람에게 갖다 바치면 상대방은 도망갈 수 있단 걸 몇 번의 짝사랑을 통해 줄곧 깨달아왔다. 하지만 깨달음은 깨달음일 뿐이었다.


지금 내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비칠지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걸 고려했더라면, 바쁘다고 하면 먼저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렸을 거다. 그걸 알면서, 다른 데 가서는 할 줄 알면서,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는 뇌 어느 한 부분이 고장 난 느낌이다.


상대는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였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세 명이서 같이 만나자고 연락한 것도 얼마나 참고 힘들었는지는 그저 내가 겪어내야 할 몫이었다.


“나 동아리 그만두려고. 이번에 정모 안 나가려고.”

“왜.”

“진짜 정모 언제 하나 기다렸는데.”

“정모면 현우도 오는 거 아니냐.”

“회장이니까 당연히 오지.”

“뭐 니 없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안 가도 되면 뭐.”

“하 내가 진짜 이번 학기 첫 정모만 눈 빠지게 기다렸는데. 단톡방 나가면 이상하게 보이려나? 왜 나갔냐고 연락 오려나?”

“아니 근데 왜 나가려는 데 갑자기.”

“...”


여느 때처럼 누워서 스피커폰으로 신찬성과 통화하다가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걸 말해도 될까.


“내가 김현우를 좋아한다. 좋아하게 됐다.”


2초의 정적이 흘렀다. 과연 뭐라고 말할까. 미쳤다고 정신 차리라고 하려나.


“너가 김현우를 좋아한다고?”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내 마음의 크기가 과연 어느 정도인지, 이대로 내버려두다간 앞으로 더 커질지 두려웠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깔끔하게 인정하고, 깔끔하게 인연 끊기. 이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어. 그래서 끊어내려고. 동아리도 안 나가고. 연락도 끊고. 졸업하기 전까지 동아리 사람들도 사귀고 재밌게 지내고 싶었는데. 아쉽다.”

“그렇다고 나갈 필요는 없지 않나.”

“얼굴 보면 생각나잖아. 계속 생각나. 진짜 미치겠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고. 그냥 정말 미친 거 같아.”

“사람 마음이 어떻게 마음대로 되냐. 내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

“야. 마음은 그럴 수 있지. 그걸 니가 어쩔 건데. 근데 니 언제부터 그랬는데.”


처음 봤을 때부터. 그 행사부터 가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행사를 가더라도 말을 걸지 말았어야 했다.


“그럼 우리 같이 만났을 때도 그랬나.”

“그치. 근데 티 하나도 안 났지.”

“몰라. 니한테 관심 없어서.”

“나 진짜 완전 연기 열심히 했잖아. 카드 섞는데 여자친구 있다고 해서... 작곡과 말고 연기과 갈 걸 그랬나 봐.”

“니 몰랐나.”

“몰랐지. 완전 깜짝 놀랐지. 그때 두 번째 만난 거였으니까.”

“연기 잘했네.”

“거기서 하필 첫 질문으로 자기 여자친구 대해서 물어보니까. 내가 얼마나 떨렸는데.”

“그때 니가 뭐라고 했지.”


역시 신찬성은 아무 생각이 없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김현우가 입었던 옷 스타일, 검은색 모자, 카드를 섞을 때 나에게 했던 말, 뽑았던 카드 세 장이 무슨 그림이었는지, 하물며 마지막으로 나가면서 했던 말까지 세세하게 기억했다. 하지만 신찬성이 그날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무것도 기억 안 났다.


“그때 첫 장부터 끊어진 다리 카드가 나왔잖아. 그래서 한 번 헤어졌었다고 말했고. 이미 시작부터.. ”

“니 그럼 내심 좋았겠네.”

“좋긴 뭘 좋아. 이게 정상적인 감정이냐. 여자친구 있다고 했잖아. 그때 들었잖아. 나도 정말 내 스스로가 이해가 안 돼. 그래 첫눈에 뭐 감정이 싹텄을 수는 있지. 지금은 안 그래야지. 안 그래? 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그럴 수도 있지. 니가 니 마음을 뭐 어쩔 건데. 너는 뭐 니 감정을 다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마음이 간 걸 뭐 어쩔 거냐고. 그럴 수 있어. 마음은 그럴 수 있는데 니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한 거지.”


신찬성이 진지하게 말할 땐 가만히 듣게 된다. 평소에 장난칠 땐 안 그러면서, 진지할 땐 그 확신에 찬 어투가 나온다. 가만 듣고 있으면 무슨 말을 해도 다 맞는 말을 하는 것만 같다.


“난 정말 끊어 낼 거야. 안 보면 돼. 만날 일을 안 만들면 되지.”

“그래. 니가 그렇게 한다는 건 그만큼 니도 좋은 사람이란 뜻이겠지.”

“어. 보고 싶어 죽겠어 정말.”

“안 죽는다.”


내가 신찬성 앞에서 이렇게 날 것의 감정을 내보이다니. 부끄럽다는 생각도 잠시, 조금은 후련해졌다.

“니 근데 할 수 있겠나. 그만두는 거.”

“그만둬야지 어쩌겠어. 어차피 동아리에 현우 오빠 말고 아는 사람도 없어. 나 휴학해서 아무도 모르잖아. 쥐도 새도 모르게 나가는 거지 뭐.”

“아니. 동아리 말고. 니 그 짝사랑.”


짝사랑. 신찬성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니 실감이 났다. 예전에 올린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몇 번이고 다시 보는 것, 카톡 답장이 오지 않아 또 보내고 싶지만 참는 것, 무슨 말로 선톡을 할지 오늘쯤 선톡을 하면 부담스럽지 않을지 고민하는 것, 이 모든 걸 사람들은 짝사랑이라 부른다.

“내가 잘못한 거잖아. 진짜 잘못된 거잖아.”

“니가 뭘 잘못했는데. 니가 뭐 지금까지 한 거 있나. 뭐 선톡 좀 보낸 거?”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무뚝뚝한 신찬성이었지만, 그날 밤 통화만큼은 위로가 되었다. 평소에 티격태격하다가도 이럴 땐 진지한 게 오빠 같았다.          



잦은 휴학 끝에 찾아온 4학년 2학기. 졸업하기 전까지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하고, 친구도 더 사귀고, 좋은 추억을 많이 쌓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동아리 연합회 행사에 가서 김현우를 만나 이렇게 내 하루를 다 잠식당하다니. 괜히 김현우를 마주치기 바라는 마음으로 등교하는 발걸음이 설레면서도 무거웠다.


나 사정이 있어서 동아리 그만 두려구... 그래도 행사 때 갈게!

ㅠㅠ 그래. 조만간 보자!


일부러 답장이 더 이어질 만한 내용이 아니게 김현우에게 카톡을 보내곤 한숨을 푹 쉬었다. 이렇게 카톡이 끝나야 마음이 편하다. 김현우에게 질문이라도 했다간 답장을 기다리느라 하루가 다 가기 때문이다.     


타로를 봤을 때 11월에 뭔가 지금과 흐름이 180도 달라지는 그림이 떴다. 좀 있으면 11월인데 대체 어떤 일들이 펼쳐지는 건가. 게다가 12월 카드는 더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심판' 카드는 모 아니면 도다. 뭐가 되었든 결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김현우가 내가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려나. 아니면 내가 김현우를 좋아하는 것이 드디어 12월에 끝이 나고 감정이 사라지나. 좋든 싫든 결과가 나오고 그것을 뒤집을 수 없다는 뜻인데, 도무지 그 한 장의 카드로는 어떻게 펼쳐질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연습이나 하러 가자. 내 할 일이나 해야지.


요즘 피아노 한 번 치고 그동안 김현우랑 나눈 카톡을 읽느라 연습에 집중하지 못하지 않았나. 카톡을 다시 훑는 동안 행여나 답장이 와서 바로 읽어버리면 안 되니 비행기 모드하는 디테일까지. 그 디테일을 연습에 썼으면 어땠을까.


카톡 알림을 켜두고, 김현우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알림은 꺼뒀다. 그러니 핸드폰이 ‘톡’하고 켜지면서 알림 메시지가 뜬다면 그건 김현우라는 뜻이었다. 마치 한쪽 눈은 태블릿으로 악보를 보고, 한쪽 눈으론 핸드폰 화면을 항시 곁눈질하듯 피아노를 쳤다.


오늘은 이제 카톡 안 올 거니까 진짜 집중해서 연습해야지.


시험 기간엔 교과서 말고 모든 책이 재밌다고 하던가. 연습실에서도 연습해야 할 곡 말고 모든 곡이 연주하기 재밌어 보인다.


잠깐. 나 이렇게 누구 좋아할 때면 꼭 노래 하나 팍 하고 나오기 마련인데. 오늘도 그러려나.


손이 가는 대로 F코드를 눌렀다. 자연스럽게 옆으로 G코드도 눌렀다. 다음은 Em7, Am7 코드. 왠지 모르게 벚꽃 잎을 사뿐히 즈려 밟는 듯한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내 카톡이 사뿐히 즈려 밟히는 그 심정을 김현우는 알까.     


오늘도 실없이 웃고 너를 보내는 길

서서히 사라지는 멀어지는 너와 나 그저 바라볼 수밖에      


이거 가사 좋다.


됐다. 피아노 건반 앞에 앉은 지 딱 10분 지났다. 완성까지 가는 곡이 있고, 가차 없이 버려지는 곡이 있다. 완성하는 곡의 특징은 1절을 10분 만에 주르륵 쓴다는 거다. 내 마음을 들키진 않았을까 가슴 졸이던 그 일상이 쌓이고 쌓이면, 감사하게도 건반에 손을 얹자마자 툭하고 바로 나온다. 코드 몇 개만 눌렀을 뿐인데 알아서 내 입에서 가사를 줄줄 읊조리고 있다.      


마치 당사자에게는 차마 전하지 못한 편지 같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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