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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ADHD와 나

제가 ADHD라고요?

공부 잘하던 모범생의 성인 ADHD 진단

by 이가연

얼마 전 ADHD 진단을 받았다. 약 상담 7년과 병원 5년, 열명이 넘는 전문가를 만나는 동안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ADHD를 새로운 병원에서 발견했다. 초진에서 ADHD 의심이라는 말을 듣고, 이후 정밀 검사를 하게 되었는데 역시나 ADHD가 맞았다. 그동안 엉뚱한 약을 먹으며 부작용에 수년간 고생하고, 나 자신이 왜 이럴까 자책하고 괴롭히는 삶을 살아왔다는 뜻이었다.


찾아보니 수많은 성인 ADHD 사람들이 진단받고 '드디어 내가 왜 이랬는지 알게 되었다'라고 해방감을 느낀다고 한다. 나 역시 각종 릴스와 영상을 볼 때마다 '이거 딱 난데. 이게 ADHD라서 그랬던 거라고?'라는 생각에 놀라움, 슬픔, 안타까움, 희망이 생김 등 많은 감정이 스쳤다.


가장 먼저 단점으로 집중력 부족이 있다. 보통 이 증상 때문에 아이들이 ADHD 의심을 받고 검사를 받는다. 그런데 나는 엉덩이가 무겁고 공부를 좋아해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내향적인 ADHD 아이라 하더라도 앉아서 멍을 때린다거나, 앉아는 있는데 성적이 잘 안 나와서 의심을 받는다고 한다. 돌이켜 생각하면 국어와 영어는 조기교육으로 잘했고, 다른 과목은 암기하면 되었다. 나는 내 암기력이 상위 0.5%쯤은 되는 것 같다. 뭔가를 외우려고 노력한다기보다 그냥 편한 마음으로 읽으면 저절로 외워졌다.


집중력이 짧다는 건 진단을 받고 알아차렸다. 이 글을 쓰면서도 가만히 글만 쓰지 않았다. 글을 쓰는 순서도 처음 부분 썼다가, 중간 부분 썼다가 왔다 갔다 했다. 돌이켜 생각하니 무언가를 하려고 노트북을 켜고 그걸 5-10분 이상 한 적은 잘 없던 것 같다. 산만함은 내향적인 사람이다 보니 머릿속으로 주로 발현되었다. 샤워하면서도 백가지 생각이 오가는데 아무 생각도 안 드는 사람도 있다니.


또한 주의력 분산도 매우 어렵다. 하나의 생각, 일, 사람에 꽂히면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무리 다른 일을 하고 있더라 해도, 껍데기만 일하고 백그라운드에서 계속 돌아간다. 그러니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ADHD가 없는 사람도 상대에 빠져서 아무것도 못하는 기분이 들 텐데, 나는 일상 마비다. 그냥 수시로 핸드폰 보면서 연락을 기다리거나, 종종 설레하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지배당한다. 힘들었던 과거 기억도 마찬가지다. 한 번 떠오르면 좀처럼 벗어나서 현재 시점으로 돌아오기가 어렵다.


일상에서 가장 문제가 됐던 건 충동성과 감정 기복이다. 그동안 이 점 때문에 조울증으로 오진이 났었다. 남들은 평소에 4-5 감정을 주로 느끼고 산다면, ADHD는 2 아니면 9라고 한다. 아무리 심하게 우울감이나 분노가 찾아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기쁨과 즐거움의 감정도 느낄 수 있어 '역시 나는 회복탄력성이 좋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감정이 크게 널뛰는 거였다. 깊은 부정적 감정에서 남들보다 금방 나올 수 있다는 게 언뜻 보면 장점 같아 보이지만 이것이 수없이 반복된다면 굉장히 지치고 피곤하다. 그리고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친구 입장에서도 상당히 당황스럽다.


그러니 한국은 주로 4-5 감정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영국에서는 하루하루 새로운 장소에 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액티비티를 했으니 얼마나 9-10 감정을 느낄 일이 많았는가. '한국에서도 그러면 되지 않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국에 오니까 춥고 귀찮아서 그냥 집에만 있고 싶었다.


가장 슬펐던 점은, ADHD 증상 중에 '지나친 말수'가 있다. 말이 많아서 상대방을 피곤하게 할 수 있단 거다. 정말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편하게 다 말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도망가버린 경우를 정말 수도 없이 많이 겪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자려고 누웠다가도, 샤워하다가도 카톡을 보낸다. 지금 당장 말하고 싶은 충동 때문이다.


이는 ADHD가 사회적 오해를 사기 쉽다는 증상과도 연결된다. 타인의 감정을 놓치거나 잘못 해석하기 쉽다고 한다. 특히나 한국 사람들은 직설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내가 싫어하고 영어에는 없는 단어, '눈치'로 알아들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이 좀 남과 다르다고 배척하지 말고, 지들이 내가 부담스럽거나 싫어지기 전에 미리 말해주면 안 돼? 싫어하는 행동 당연히 하고 싶지 않은데 진작 말을 안 해주고 휙 가버리면 내가 뭐가 돼!'라고 머릿속에서 수없이 소리치는데 지금 한국인들과 인간관계가 쉬울 리 없다. 특히 내가 과거 좋아하던 사람은, 나를 차단하면서 본인이 그렇게 티를 냈는데 내가 못 알아챈 거라며 화를 냈다. 과제 때문에 바쁘다고 했으니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럼 그 말이 다 거짓이었던 건가.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거짓말을 하고 사는가. 이렇게 나의 케이스를 알리면서, 좋은 사람인건 알겠는데 자꾸 눈치 없이 귀찮게 하는 주변 사람이 있다면 혹시 ADHD라서 그런 건 아닐까 의심해 줬으면 좋겠다.


또한 ADHD는 거절에 민감하다. 나는 이제 막 대화를 시작했다고 생각하는데, 하고싶은 말이 아직 한참 남아있는데 상대가 카톡으로 '좋은 하루 되세요'로 마무리 지어버리거나 답장을 기다렸는데 내가 보낸 말에 좋아요만 누르고 튄 사실을 알게 되면 순간 욱했다. '저 사람은 이런 부분에서 나랑 안 맞으니까 거리를 둬야 돼'라고 생각해도 나의 '말하고 싶은 욕구'가 앞서기 때문에 보내고 상처받고 보내고 상처받음을 반복했다.



그다음으로 감각이 지나치게 민감하다. 그 어떤 소리와 빛이 있으면 잠자기 거부한다. 정말 아주아주 작은 빛도 안 된다. 칠흑 같은 어둠이어야 한다. 어릴 때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에 잠을 잘 수 없어서 자다가 시계를 빼서 밖에 두니까 예민하다고 한 소리 들은 기억이 있다. 그 뒤로 내 방에는 초침이 있는 시계는 없었다. 그러니 비행기, 버스, 기차 같은 바깥 공간에서 잠에 잘 들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수면 문제 또한 스트레스가 많은 시기에 발생하곤 했다. 작년 영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6,7,8월 내내 잠을 제대로 못 잤다. 특히 돌아온 직후에는 3주 동안 하루에 3시간 밖에 못 잤다. 시차 적응 기간인 줄 알고 안일하게 생각하다가 병원을 두 군데 찾았지만 둘 다 안타깝게도 약이 듣지 않았다. 근본적인 원인은 ADHD인 사람이 너무 큰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의문이었던 점은 ADHD 단점 중에 시간 관리 어려움과 잦은 실수는 없다. 그 이유는 추측하건대 완벽주의 때문이다. 내가 약속에 5분 이상 늦을 일은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했다. 살면서 핸드폰을 잃어버린 적도 한 번 없었다. ADHD라고 하면 물건 깜빡깜빡하고, 부주의한 사람일 거라 나 자신조차도 그리 생각했는데, 난 그렇지 않다.


ADHD는 목표 달성의 어려움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한 번 정말 굳게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이뤄내는 독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내가 중간에 포기했다면 애초에 그렇게 원하지 않던 일이었고, 마음먹은 일은 해내왔다. 자폐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고 불릴 만큼 케이스가 다양한데 ADHD라고 안 그러겠는가. 당연히 ADHD 증상을 내가 다 가지고 있지는 않다.



대신 창의력, 다재다능함, 열정, 적응력, 모험심, 에너지, 유머 감각, 다양한 관심사, 열린 사고, 독립심, 매력적인 성격, 직관력, 미래 지향적, 다양성 존중이라는 장점을 가졌다. 아무리 단점이 많다 해도 하늘에서 '너 그럼 ADHD 없이 다시 태어나고 싶어?'라고 한다면 사양이다.


ADHD가 있었기에 지금 내가 있다. '뮤지션'의 나부터 보자. 한 사람 때문에 11곡을 썼다. 정확히 표현하면 쓴 게 아니라 토해냈다. 머릿속에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만 가득하니까 그게 곡으로 토해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평생 짝사랑, 즉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는 상대에 대한 곡만 썼다. 자제력이 없는데 강제로 자제해야 하니까 곡으로써 해소했다. 울부짖고 소리 지르고 싶었을 순간에도 성격상 그러지를 못하니, 노래로써 고음이 나올 때마다 소리를 마음껏 지르며 해소했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가족들에게 열이 뻗혀있을 때마다 방 안에서 고음 지르며 시끄럽게 하는 걸로 복수하며 카타르시스를 많이 느꼈다. 그다지 노래 부르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고 으아아아아악 소리를 지를 순 없으니까 그냥 노래로 지르곤 했다. 그러니 나의 감정 표현을 건강한 방식으로 도와준 노래에 강한 애착이 생겨 지금까지 뮤지션을 하게 되었다.


'6개 국어'를 하는 나도 마찬가지다. 한국어, 영어, 일본어만 해서는 성에 안 차니까 일본어 프리토킹 잘하니 중국어, 중국어 프리토킹 잘하니 스페인어, 그런 식으로 넘어갔다. 관심사가 많은데 열정, 에너지, 도전 정신, 미래 지향적인 마인드까지 있으니 당연히 능력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거 했다 저거 했다 하는 말이 참 억울했다. 이거도 잘하고 저거도 잘하는 건데. 일본어, 중국어 각각 1년씩 학원만 다녀도 프리 토킹 했다.


'작가'로서 나도 현재까지 2권을 출판했고, 지금 책으로 낼 수 있는 원고가 2개 있다. ADHD라는 말을 들으니 이거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너무 많은데 책을 쓰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사는 내내 글쓰기를 매우 좋아한 이유를 알겠다. 글을 쓰면 머릿속이 정리가 되니까. 어릴 때부터 글을 남들보다 정말 압도적으로 빨리 썼다. 머릿속에 이미 생각, 아이디어가 넘치니 그걸 글로 적어만 내리면 되었다.



ADHD와의 공존, 지금까지도 열심히 잘 살아왔는데 알게 된 지금부터는 얼마나 더 잘 살 수 있을까. 자책과 후회가 확실히 줄어들 것 같다. 그때그때 내 의지로 고칠 수 있던 게 아니라, ADHD 때문이었구나 생각하니 조금은 더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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