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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ADHD와 나

ADHD인 나도 나다

by 이가연

작년 8월, 갑자기 영국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오후 3시쯤 예약했는데 그날 밤 비행기였다. 통장에 천만 원쯤 있으면 모를까, 고작 몇백만 원 있는 사람이 하기에는 참 충동적인 선택이다. 내가 영국에 간다고 한들, 상대가 나를 만나주지도 않을 거 잘 알지만, 그냥 한국에 붙들 수 있는 게 없었다. 친구는 어떻게 사랑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냐며 혀를 내둘렀는데, ADHD의 충동성 때문 아니었을까.


그러곤 9월, 갑자기 창원에 갔다. 한국에 붙들 수 있는 게 없는 줄 알았는데 하나 있었나 보다. 1박 2일 동안 여행하면서 5개의 영향을 유튜브에 올렸다. 찍고 카페에서 쉬면서 올리고, 찍고 바로 올리고를 반복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브이로그 형식의 영상 업로드는 처음이었다.




새로운 스타일의 영상을 올린 것 자체는 ADHD의 창의력, 에너지와 열정 덕이다. 가서 당장 만날 수 있다고 믿은 것도 아니고, 정말 그 사람의 고향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고 느끼고 싶어서 갔다고 하지만, 일주일 뒤에 갈 수도 있었는데 당일 아침에 기차표를 끊었다. 그것도 추석 연휴라 계속 새로고침해서 겨우 한 자리를 확보해야 했다. 마음먹은 건 당장 실행해야하기 때문이다. 그 새로고침을 미치도록 하던 그 순간들은, 비유를 하자면 화장실 가는 걸 오래 참는 기분이다. 그러면 어떤 일을 하든 화장실 가는 거 말고는 다른 생각이 안 들고 괴로워진다. 당장 화장실 가는 거 말고는 해결 방법이 없다. 나도 당장 영국 가는 거 말고는 해결 방법이 없었다. 이처럼 ADHD는 주의력 분산이 되질 않는다. 하나의 생각, 일, 사람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가 없다. "너 화장실 가는 생각 하지마! 집중해!"라고 한다고 소용이 있겠나.


친구는 어느 여자가 그렇게까지 사랑을 표현하겠냐고, 남자도 못하는 일을 네가 하고 있다고 했다. 문득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원래 ADHD가 과도한 관심 표현과 충동적 행동을 보이고, 해야될 말과 안 하면 좋을 말을 구분하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내가 작년부터 ADHD 약을 먹었어도 그렇게까지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ADHD인 나도 나다. ADHD 증상 때문에 뭔가 행동을 했다면 그것도 나다. 때론 받아들이기 힘들고 스스로에게 짜증도 나겠지만, 그 자체로 나다. 수많은 사람들이 ADHD 증상 때문에 그랬던 걸 이해해주지 못하고 막말을 하고 떠난 건, 그들이 품을 수 있는 그릇과 그들이 아는 세상이 딱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ADHD의 장점인 다재다능함, 열정, 에너지, 유머 감각, 공감 능력, 도전 정신, 다양한 관심사 등 때문에 나를 좋게 보고 가까이했으면서, ADHD의 단점이 나오니 그동안 내게 보였던 따뜻함을 한순간에 철수하고 도망간 것이 아닌가.


지금 나와 친한 사람들을 떠올리니 바로 알겠다. 나도, 가족들도, 아무도 몰랐던 나의 ADHD를 친구들이 알고 내 곁에 있던 것이 아니다. ADHD였던 걸 몰라도 그저 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준 거다. ADHD라서 보였던 남들과 다른 특이한 행동들에도 재밌어하고, 때론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을 거다. 그러니 그들은 '아하, 네가 그래서 그랬구나!' 할 자격이 있다. 나를 떠난 사람들은 ADHD에 대해 설명을 해줬어도 똑같았을 거다. 그러니 아쉬워할 필요 없다.


ADHD 진단은 그동안 뿌리 깊었던 자기혐오를 낮추고 나 자신부터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왔다. 앞으로의 삶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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