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연애가 2022년에 한 달이고 그전엔 2020년에 두 달인데, 나도 얼른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지만 쉽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명백하다.
기쁨, 즐거움, 슬픔, 괴로움, 분노의 감정을 느꼈을 때 오빠에게 바로 카톡 보내는 게 일 년째 습관 되어 있다. 애인이 생기면 당연히 애인에게 먼저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 거다. 근데 그런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남자가 있을까. 나는 실시간으로 답장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표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란 걸 아름답게 봐주는 '사귄 지 얼마 안 된 남자'가 존재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아주 조금이라도 이 사람이 나를 귀찮아하거나, 이상해하거나, 특히 힘들어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 있다면 나는 100% 믿을 수 있는 오빠에게 대신 말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엄마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아이처럼.
길거리에서 아이가 막 저 사람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아이 엄마가 "쉿. 그런 말 하는 거 아냐."라고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쉽다. 성인 ADHD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서 즉시 표현하는 게 도드라져 보인다. 일반 성인들은 때와 장소에 맞게 말할 줄도 알고, 가면도 쓸 줄 알고, 거짓말도 할 줄 알기 때문이다.
영국에 있을 때 여자인 친구 사이에서 거짓말 이슈가 터진 적이 있다. 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를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그냥 나에게 거짓말을 했던 장면이, 영상처럼 찍혀서 머릿속에서 무한 반복 재생되기 때문이다. ADHD 뇌는 자꾸 떠오르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이게 지금 언제 적 일인데도 피가 거꾸로 솟을 거 같다. 이런 심박수 빨라지는 걸 어떻게 막을 건데. 뇌가 즉각적이고 솔직한 반응을 하도록 되어 있어서, ‘일반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거짓말을 한다’는 개념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사회적 관계가 어렵다.
그래서 사실 나에게 제일 필요한 남자는, 나는 너를 사랑하니까 모든 걸 이해하고 거짓된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지만 밖에 나가면 사람들로부터 너가 상처를 받을 수 있으니까 이래 이래 하면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동안 한두 달 연애만 해본 결과, 그냥 연애 감정으로 연애하면 상대가 무조건 1-2주 이내에 잘못을 해서 화가 났다. 남자는 한 번 사과했으면 풀린 줄 안다. 나도 내가 풀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ADHD 뇌는 그걸 무한 반복 재생시킨다. 그렇다고 그걸 계속 생각난다고 말할 수가 없다. 사과를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내가 자꾸 과거의 영상이 떠올라서 괴롭다고 열 번 말해도 열 번을, "어떡하지. 그럼 내가 어떻게 해줄까? 고기 사줄까?"라고 말할 수 있는 남자가 있으면 한 번 데려와봐라.. 애초에 두 번 이상 말할 수 없이 혼자 괴로웠다.
사과를 한 번 했으면 내가 바라는 건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를 사랑해 주면, 아무리 뇌에서 그런 과거 영상이 반복적으로 돌아가도 끌 수가 있었겠지. 이미 일어난 상처를 지울 순 없어도, 덮을 순 있었는데 사람들은 덮어주질 않았다. 그저 내가 용서를 못해서 모든 연애가 실패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ADHD 뇌였음을 알게 된 이상, 물리적으로 불가하단 걸 깨달아서 속이 시원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내가 친한 친구, 애인으로 둘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 중 1%도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이미 충분히 있다.
애초에 화가 나지 않아야 한다. 딱 그 정도 좋아했기에, 나도 그런 감정이 든 거다. 그리고 당연히도, 상대도 나를 딱 그 정도 좋아하니 화나게 했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동은 절대 안 하려고 노력한다. 그건 애써 노력이 아니라, 당연히 드는 마음이다. 한 달을 사귀었든, 삼 년을 사귀었든, 사랑하면 어떻게든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거 말곤 중요한 게 없어진다.
그동안 모든 연애에서 만난 지 3주 만에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파탄이 났다. 한 달 안에 끝나거나 아니면 속이 다 닳고 너무나 하루하루 힘든 채로 질질 끌다가 두 달 안에 끝났다. 연애로 행복했던 기억이 없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내가 말해줬잖아"라고 실제로 말하거나 그런 태도를 취했다.
내 기준에선 서로 사랑한다면 싸움이 일어날 수가 없다. 한쪽이 화가 난 경우만 있을 수 있다. 싸움은 둘 다 화를 낸 것이다. 어떻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화가 났는데 거기에 화가 날 수가 있지. 내가 화를 냈을 때 상대가 화를 내면, 난 다시는 다시는 감정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낄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은 그동안 데이터상, 참다 참다 터트릴 줄만 알고 그때그때 말할 줄 모른다. 전혀 몰랐던 나만 날벼락이다. 그동안 나에게 상처 준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이게 자폐랑 유사한 증상도 있었어. 어떻게 그런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라고 울부짖고 싶었다.
지난 27년 인생을 되돌아보면, 이런 사람은 앞으로 절대 만나면 안 되겠다는 데이터만 쌓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앞으로 이런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아끼는 사람'의 데이터가 쌓였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알아서 더욱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