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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일본어

by 이가연

내 사촌동생 이름은 이나연이다. 못 본지 14년 됐다.


이름 짓는데 내 영향이 조금도 없었다고 누가 할 수 있을까. 한국에 있었다면 자매처럼 지냈을 수도 있었다. 부모의 이혼으로 그 아이들이 엄마의 고국인 일본으로 떠났을 땐, 애들이 너무 어렸다. 만 5살쯤이었다. 몇 년만 더 있다가 떠났더라면, 연락처라도 알았을 수 있는데. 나를 기억할 수 있는데. 사진에서 왼쪽이 나연이고, 벌써 10년 전 사진이다.


작은 엄마 영향으로 일본어에 관심이 많았다. 구몬 일본어로 히라가나 썼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아쉽게도 작은 엄마랑 일본어로 한 마디도 해본 기억이 없다. 한국어를 워낙 잘하셨다.


삼촌은 이혼하자마자 몇 달 만에 재혼했다. 중학생의 나이에도 욕이 나왔다. 만일 그 아이들이 한국에 아빠를 보러 온다면, 일본어를 전혀 못하는 우리 가족은 삼촌을 통해야 대화가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절대 그러고싶지 않았다.


또 번역기 쓰지 않고 직접 얘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일본 드라마 보면서 공부했다. 난 영어도 어려서부터 디즈니 채널, 오디오북, 노래로 자연스럽게 익혔기에 일본어도 스스로 그렇게 했다.


이 마음을 잊지 않고 일본어를 하고있다. 나에게 일본어는 단순한 자기계발이 아니었다. 꿈에 아이들이 나와서 한바탕 운 날도 있었다. 일본어는 그들과 결코 끊어지고싶지 않다는 나의 발악이자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래서 중국어를 아무리 해도 일본어를 못 따라잡나보다. 애초에 출발점부터 마음가짐과 애착이 다르다.


이혼이고 재혼이고 그들이 나의 사촌 동생임은 평생 변함 없다. 피가 섞인 존재들이다. 그래도 친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오지 않을까 했는데 엄마가 그랬으면 진작 할머니 보러 한국에 왔지 라고 팩트를 날렸다. 맞다. 사실 한국에 대해 악감정이 있을지도 우린 모른다.


10년 간 희망고문을 당했다. 첫째가 열살이 되면 한국에 올 수도 있다는 말이 시작이었다. 그다음엔 애가 이제 사춘기라서 예민하다고 했다. 몇 년 전부터는 받아들였지만, 그 지난 10년은 내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기다렸다.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한국에서 차별 받을 수 있단 걸 생각하면, 일본에서 자라는 게 더 맞다는 생각도 했었다. 둘째는 엄마 닮아서 일본인 같은데, 첫째는 아빠 닮아서 한국인 같아서 걱정도 되었다. 그래도 엄마가 일본인인채 한국에 사는 거보다 더 나았을 거다.


오사카 여행 중 쪼그만한 일본인 여자 아이가 쫑알쫑알하는 거 보니 눈물도 났다. 2006년생이지만 내 기억 속엔 유치원생이다.



사실 지난 10년 간은 내가 아이들이 보고싶은 줄만 알았다. 그런데 몇 년 전에 깨달은 것이, 실은 나는 작은 엄마가 더 보고싶은 거였다. 나는 중학교 2,3학년 때부터 학교에 믿을 만한 어른이 생겼고 그전까지는 너무 보호받지 못하는 아동이었다. 가족, 친척 다 합쳐서 어린 시절 나에게 항상 변함없이 친절하고 따뜻했던 사람은 작은 엄마가 유일했다.


나도 성인이니, 이혼하고 몇 달 만에 재혼한 전남편의 조카가 보고싶지 않을 그 마음을 이해한다. 한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채 뒤흔든 한국이다. 그래도 내가 어떻게 컸는지 전혀 궁금하지도 않으실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오사카 서점 일본어 코너에서 작은엄마가 2009년 무렵 선물해준 히라가나 책을 발견하고 울었다. 그래서 그 책 가타카나 버전을 사왔다. 그걸 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여행 첫날 갔던 서점에서도, 동화책 코너에서 작은엄마가 이런 동화책들 보면서 나한테 선물해줄 책을 골랐을 생각하니 울컥했다. 그 히라가나 책 말고 훨씬 더 어려운 동화책 한 권도 더 있다. 당시엔 못 읽고 JLPT N2 땄던 직후엔 읽었던 거 같다. 지금도 못 읽겠지..



일본 방송에 데뷔할 날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방송 나와 얘기하면, 아 어떡해. 하고 똑같이 우실 거 같다. 도톤보리 야경을 구경하면서 큰 전광판을 보며 '저런데 내 사진이 걸리면 된다. 그러면 된다.'고 새겼다. 그거 말곤 방법이 없어보인다.


구글링을 저녁부터 새벽 3시까지 해서 미국에 사는 엄마 친구도 찾았던 나다. ADHD다. 그 아이들도 찾으려고 노력했었다. 일본어로 사진과 함께 사람 찾는다는 글도 계속 올렸었다.


난 내가 사랑하는한 포기하지 않는다. 때때로 포기한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그건 존중하기 때문이다. 진짜로 삼촌이 내 SNS를 전해줬다면, 연락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여야지. 그 존중이 더 큰 사랑임을 배웠다.


살면서 많이 울었다. 걔넨 내 존재조차 모르지만, 많이 사랑한다.


진심이 닿지 않을 리가 없다. 시간 차가 있어도, 마음이 있으면 닿는다는 걸 안다. 마음의 크기가 같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는 건 그걸 다 감당하겠단 뜻이다. 나의 존재를 모르든, 별 관심 없든, 무조건적일 때 사랑한다는 말이 나온다.


보고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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