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다시, 소튼

by 이가연



'감정 예측 오류' 같은 소리 하네. 아주 잘 예측했다.


그렇게 전문 용어 써가면서 분석하는 게 내가 잘 쓰던 방어 기제 중 하나였단 걸 다시금 깨달았다. 감정을 느끼기 너무 아프고 불편하니, 분석하고 해석하는 이게 '주지화'다. 아, 지금도 그러고 있네.

늘 무거운 마음으로 이 도시를 다시 찾았다. 그런데 이번에 뭔가 좀 달랐다. 뭔가 텅 빈 느낌. 아하, 아무도 없을 거 알아서구나. 작년 12월엔, 졸업식에 누가 올지, 내가 여기서 누구를 마주칠지 모른다는 그 기대감 때문에 기분이 지금하고 매우 달랐다는 걸, 나는 웨스트키 쇼핑몰을 보자마자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왜 이 노잼 도시를, 6박 중에 5박이나.'싶었다. 작년 12월엔 그런 생각이 안 들었다. 혹시 졸업식 왔으면 마주치고 싶었으니까.


심장도 소모품이다. 하루에 뇌를 많이 쓰면 머리가 지끈거리듯이 소튼 거리를 마음 찌릿찌릿해지는 노래 들으면서 걸으면 소모된다.


그걸 깨닫고 헤드폰을 벗었더니 확 기분이 달라졌다. 호텔에 짐 보관을 하자마자 기숙사 옆방 시끄러울 때마다 대피했던, 한국 돌아갔을 때 입맛에 맞는 밀크티 없어서 미쳐버리게 했던, 그 밀크티집에 갔다. 한참 거기서 밀크티 마시며 여행 일기 쓰곤, 당나귀 보러 가려고 버스에 탔다. 역시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이스트본 호텔에서 출발해서 씨포드에서 아침 먹고 브라이튼을 거쳐 사우스햄튼에 도착한 뒤, 이어서 뉴 포레스트까지 가다니. 이건 영국에서 몇 달을 지냈지만 처음 있는 일이다. 그동안 아무리 여행으로 방문했어도 바스면 바스, 윈체스터면 윈체스터, 하루에 한 도시만 갔다. 도파민 폭주하는 티가 팍팍 난다. 호텔 체크아웃할 때만 해도 내가 브라이튼에서도 내릴 거, 당나귀 보러 갈 거 생각 안 했다.


해가 늦게 지는 덕분이기도 하다. 겨울이었으면 오후 3시에 다른 도시로 이동할 수 없다. 3시 반이면 노을 진다. 해 떨어지고 혼자 소튼 거리 걸으면 진짜 마음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해 지기 전에 호텔 돌아오기. 메모메모' 했다. 여름엔 그럴 걱정이 없다. 오후 8시 반은 되어야 스멀스멀 해가 지기 시작하는데, 친구랑 펍 가는 게 아닌 이상 9시 넘어서 혼자 밖에 있지 않는다. 이제 겨울에 크리스마스 마켓 구경 충분히 한 거 같으니, 당분간 겨울에 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제는 춥다고 난리 쳤는데, 브라이튼만 해도 바닷가라 춥더니 사우스햄튼 도착하자마자 날이 따뜻했다. 조금이라도 내가 헛헛한 기분 덜 느끼길 바라는 거 같다. 하늘이 날 반겨주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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