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버스 정류장에서 내가 기침만 해도 "블레스유" 해주고, 버스 타서 카드만 찍어도 기사가 "러블리 땡큐" 해준다. 내가 살아가는 도시는 필히 이래야 된다. 지금 여행기에 최대한 한국과 비교하며 한국 비하 발언은 자제하고 있다. 지금 현재를 즐기기 위해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비교가 될 때가 있다.
당나귀 보러 린드허스트에 두 번 가봤다. 똑같은 데 가면 재미가 덜하니, 이번에는 브로큰허스트로 갔다. 문제는 아무리 찾아도 정확히 당나귀들이 어디 있는지 안 나왔다. 인터넷에 정보가 없는지 챗GPT도 계속 도움 안 되는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래서 일단 부딪혀보기로 했다. 버스 타고 애쉬허스트 역에서 내렸다가 주변에 아무 것도 없어서 기차 타고 한 정거장 거리 역에 내려서 걸었다. 그러다 집 앞에 주차된 차에서 뭔가를 꺼내는 남자에게 당나귀 보려면 어디로 가야 되는지 물었다. 이 동네 주민이니 잘 알 거 같았다. 그랬더니 쭉 반 마일 정도 직진하면 작은 개울가에서 왔다 갔다 할 거라고 했다.
그런데 한참 걸어도 주택가만 나오니,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주변에 걸어 다니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이런. 오늘 이미 충분히 많은 도시 돌아다녔는데 발바닥만 아픈 거 아냐?'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당나귀를 보고 말겠단 생각도 있었고 정 안되면 이미 가본 린드허스트로 가면 되었다.
'일단 배고프니 밥부터 먹자.' 생각하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나를 향해 걸어오는 당나귀들을 발견했다. 세상에. 너무 놀랐다. 내가 놀라며 환히 미소를 지었던 순간이 기억에 오래 남을 거 같다. 나는 어디 넓은 풀밭에 가아 볼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계속 주택가만 나오니 이건 아니다 싶어서 파스타 먹으러 가던 중이었다.
아까 아저씨들이 말한 작은 개울이 이거였구나. 린드허스트는 자연경관이 훌륭한 언덕에 있었는데, 이번엔 그냥 주택가를 어슬렁거리는 당나귀들을 발견한 터라 놀라웠다. 도로 위에 당나귀들이 걸어다니니 차들이 가로막히는 모습 보는 것도 신기했다. 어디 강원도 산골짜기 출신도 아니고 서울 사람은 신기할만 하다.
당나귀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며 뭔가를 먹고 있자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너네한테 안 좋을 거 같아 달링."하시는 것도 마음이 따스워졌다. 뭔 냄새를 맡았길래 저러고 있던 것일까.
뒷발에 걷어차일까 봐 당나귀 바로 뒤엔 절대 있지 않았다. 하나도 안 무섭게 생겼지만 무섭다. 생각해보니 얘네한테는 밥 먹는데 자꾸 따라오는 인간 놈이다. 저 인간 왜 따라오나 싶어서 찰 수도 있지 않은가. 당나귀들 정말 귀여워서 조금 무리해서라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따뜻했는데 갑자기 너무 추워져서 이제 어느 정도 구경했으니 서둘러 식당으로 이동했다.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많이 분다. 게다가 일교차도 정말 심하다.
저녁으론 까르보나라를 먹었는데, 식당이 괜찮았어서 지도에 표시해뒀다. 다음에 당나귀들 보러 또 와야지. 그게 과연 내년일까.
린드허스트는 정해진 언덕에 가면 무조건 만날 수 있고, 브로큰허스트는 애들이 한 군데에서 놀고 있는 게 아니라서 어느 순간 반갑게 만나게 된다는 걸 알았다. 두 장소 다 매력이 있다. 어디서 만날지 모르는 쪽이 더 도파민 터지긴 하지만, 기다리다가 지칠 수도 있다는 단점도 있다. 오늘 내가 운이 좋았던 걸지도 모른다.
그동안 버스 타고 갔다. 문제는 이 버스가 1시간에 한 번 온다. 어제 친구 막차가 9시였던 걸 몰랐던 것처럼, 영국은 어디 갈 때 미리 시간을 잘 봐야 한다. 전에 울며 겨자 먹기로 우버 불렀었다. 이번에 돌아올 때는 바로 앞 브로큰허스트역에서 기차를 탔다.
지금 기차에 앉아 이 글을 쓴다. 호텔 체크아웃한 지 12시간이 넘게 지났다. 오늘 땅 밟은 도시만 5군데다. 호텔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이제야 눈이 감겨오고 피곤해지는 걸 보아, 참 즐거웠던 하루였단 생각이 든다. 역시 여행은 즉흥이 제 맛이다. 어제에 이어 도파민 풀충전, 아주 좋았다.
씨포드는 작고 조용한 바닷가, 브라이튼은 이미 잘 아는 바닷가였다면, 갑자기 걷다가 당나귀들을 만나 절로 환하게 웃음이 지어지던 브로큰허스트야말로 오늘의 하이라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