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by 이가연

머리를 한 번 감을 때마다 빗자루가 되는 기분이다. 기가 막힌다. 평소에 피부며 머릿결이며 관심이 없었는데 영국 살 때 처음으로 '이게 나빠지고 있는 거구나.' 깨달았다.


바로 이런 거다. 영국 도착해서 하루이틀은 천국 같지만, 곧바로 이런 게 눈에 띌 걸 알았다. 여긴 불편한 천국이기 때문이다. 벌써 감자튀김 질린다. 한국에선 햄버거고 감자튀김이고, 일 년에 몇 번 먹을까 말까 한 음식이다. 그마저도 영국 생각나서 먹었다.

소튼 오는 길에서부터 내내, 타이틀곡 믹싱 수정 요청을 거의 열 번째 하고 있다. 노래에 들어가는 악기가 많고 무엇보다 타이틀곡이라 신경이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모든 곡이 쓰라리긴 하지만, 이 곡은 두 번째로 쓰리다.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한국에서부터 온 파일 들으며 시내로 갔다.


도파민 폭주 이슈로 계속 잠을 오래 못 잤다. 오늘은 그게 좀 터졌다. 친구 오기로 했는데, 아까부터 매우 졸리다. 오늘은 5시간 잤다.


오늘은 정해진 일정이 있었다. 오전 11시에 학교 에비뉴 캠퍼스에서 커리어 컨설팅이 있었고, 오후 12시 반부터 2시까지는 시내에 있는 학교 건물에서 수업 청강이 있었다. 나이스.



먼저 나는 하이필드 캠퍼스에서만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졸업생인데도 에비뉴 캠퍼스는 처음 가봤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거기 놀러 가볼 만하냐고 물었는데, 진짜 별 거 없다 해서 안 가봤다. 가보니 역시 학교 건물 특유 느낌이 나서 반갑기도 하고 마음이 짠해지기도 했다.

만나기로 한 장소가 어딘지 잘 모르겠어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다 한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는데 환히 웃어줬다. 하, 눈 마주치면 환히 웃어주는 거 너무 행복하다. 그러니 나도 환히 웃게 되잖아. 여기서 짧게 석사 유학한 한국인 중에 눈 마주치면 같이 웃고 인사하던 문화가 미치게 그리운 사람은 없을 거다.

내가 만나기로 한 장소를 얘기하니 자기가 같이 가주겠다며 길을 안내해 줬다. 그러곤 반갑게 커리어 컨설턴트와 만났다. 한국에서 직장 구하는 거 포기했다고, 한국과 가까운 나라 중에 생각 중이라고 얘기했다. 영국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나, 영국은 풀타임으로 직장을 구해야 살 수가 있다. 작년에 영국에서 지원했던 건 보컬 튜터 직업인데, 이건 파트타임만 있다.

문득 이 컨설턴트는 어쩌다가 뮤직 커리어 클리닉을 하게 됐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다. 인문학부 담당 커리어 컨설턴트인데, 스페셜티로 음악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학교 가서 원데이로 진로 강의하곤 했다고 얘기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 일을 진심으로 즐겼고, 제발 일주일에 두 번은 그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 년에 한두 번꼴인 게 문제였다.

그래서 그런 진로 담당 쪽도 직업을 생각해 보라고 권해줬다. 대학에서 학생 유치하는 쪽도 괜찮아 보였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 전담을 맡으면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다 하기 때문에 내가 딱이다. 나 같아도 나 뽑는다. 컨설턴트도 공고에 필수 자질을 같이 보면서, "다양한 문화권이랑 교류하는 능력, 넌 당연히 있지."라고 했다.

보컬 선생만 고집할 게 아니었다. 이미 한국에서 계속 해봤는데, 나랑 찰떡으로 맞는 느낌이 아니었다. 적성에 반은 맞고, 반은 안 맞는다. 노래 가르치는 것보다 피아노나 영어 가르치는 게 쉽게 느껴진다.


어차피 당장 뮤지션으로 돈 벌 수가 없다. 제일 좋아하는 일은 아직 기회가 없으니, 두 번째로 좋아하는 일로 돈 벌면 된다. 노래 레슨할 때보다 진로 강의할 때가 훨씬 시간도 빨리 가고 행복했다. 직접 노래를 시연하거나 가르치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성에 매우 잘 맞았다.

이래서 전문가와 얘기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학교 다닐 때, 이력서 첨삭을 4번 받고 커리어 컨설팅도 여러 번 받을 정도로 영국 취직 준비를 했었다. 이젠 영국 쪽은 생각이 거의 없지만, 그때 준비한 것이 제로가 된 게 아니다. 영어 이력서도 준비되어 있고, 해외에서 어떻게 직장을 알아봐야 하는지도 잘 안다. 그래서 오기 전에, 이미 홍콩에 이력서를 3군데나 바로바로 넣을 수 있었다.

책도 내고 앨범도 내고 정말 잘하고 있다고, 내가 하고 있는 게 다 맞고 했다.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냥 기회가 없을 때도 있단 말에 찡했다. 내가 생각해도 책 출간과 앨범 발매를 합치면 영국 석사 학위 하나 정도의 노력 강도다. (공대 제외)

커리어 컨설턴트와 대화하고 나니 자신감이 좀 생겼다. 역시 예약하길 잘했다며 뿌듯한 마음으로 나섰다. 오는 길에 사우스햄튼 커먼도 걸었는데 공원이 듣던대로 참 예뻤다. 사람이 별로 없길래 카메라 들고 무반주로 노래도 부르면서 걸어왔다. 아침 시작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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