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래도 사우스햄튼

by 이가연

한 때 나의 집에 들렀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공원을 보게 되었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내가 왜 걔를 처음 만났을 때 집 앞 공원에서 만났지. 어디 카페도 아니고 바로 집 앞 1분 거리 공원이었던 게 왜 그랬는지 기억이 안 난다. 이렇게 기억 휘발되는 거 싫어서 급하게 소설을 썼었구나.

기억 아직 남아있을 때 소설 그냥 다 실화로 고쳐 쓸까. 저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건 작년 5월이다. 앞부분 설정은 많이 바꿨다. 그걸 쓸 때만 해도, 혹시 이걸 읽고 욕할까 봐 심히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건 소설이라며 방어하기 위해서 그랬다.

좋든 나쁘든 걔가 엮인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운 장소가 사우스햄튼에 몇 없다. 펍이고 식당이고 영국인 친구와 함께 자주 가서 기억을 덮으려는 시도도 이미 많이 해봤다. 덮이지가 않는다.



시내에 '바게이트'라는 한국식으로 치면 미니 남대문 같은 건축물이 있다. 거길 기준으로 아래쪽은 비교적 자유롭다. 한식당 하나만 잘 무시하면 된다. 특히 밀크티집은 같이 간 적 없어서 무사하다. 그래서 그렇게 거기만 가면 편안해하는 것 같다.

바게이트 위쪽은 다 위험하다. 작년 12월에 너무 괴로운 경험을 해서 더 그런다. 기차역에서 걸어서 호텔 가는데, 진짜 추워서 떨리는 건지 공포감에 떨리는 건지 걸어가는 길이 너무 무섭고 서글펐다. 밤에 걸으면서 통화를 많이 했었다. 이 정도로 괴로울 줄 알았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내가 무언가 바꿀 수 있을까. 어느 순간부턴 지금 무서워서 통화하고 있는 게 아니란 걸 나도 깨달았는데.


작년 8월도, 12월도, 지금도 변함없이 사우스햄튼 숙박은 유쾌하지 않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여길 매번 찾는다. 이쯤 되면 무슨 아픔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고, 다른 도시에 묵으면 되지 싶기도 하다.

도저히 놓을 수가 없는 기억이 있어서, 사람이 있어서, 각오하고 오는 수밖에 없다. 그걸 이젠 제발 기 위해 한 시도는, 고3 1년 동안 대입 스트레스 수준이었다. (참고로 실용음악과 경쟁률 최대 500:1이었다.)


어떤 감정을 느껴서 괴롭든 감당하겠다는 마음으로 매번 온다. 각각 다 다르게 힘들었다. 8월은 내가 지금 영국에 갑자기 다시 왔단 거를 알린 상태였고, 12월에는 졸업식에 오는지 안 오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졸업식 즈음만 해도, 그래도 나를 기억할 거란 생각은 했는데 이젠 모르겠다. 완전히 잊혔을 수 있다는 생각 들 때가 가장 견디기 힘들다.


내 영국인 친구는 지금 남자친구를 2년 동안 차단했었다고 한다. 이 친구는 그전에 7년을 장기 연애했다. 친구에서 살짝 넘어가는, 애매한 사이 같아서 이러면 안 될 거 같아서 차단했다고 했다. 그런데 2년 뒤 차단을 풀었고, 그 남자는 좋아한 지 5년 만에 얘랑 사귀게 됐다. 친구는 정말 헤어지자마자 거의 일주일 만에 바로 사귀었다. 처음엔 친구도 환승하는 거 같다고 괴로워했지만, 지금 1년째 잘 만나고 있다. 그럼 무슨 상관인가. 내가 그래서 너는 대체 지금 남자친구 차단을 왜 풀었냐 물어보니, 솔직하게 그때 좀 전 남친과 잘 안 풀리고 힘들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내가 걔 인생이 잘 안 풀리고 있기를 바랄 순 없다..


이 얘기를 친구가 나에게 해주면서, 자기도 2년 차단했다가 풀었지만 그래도 나에게 희망 고문을 주기는 싫다고 했다. 이미 계속 큰 고문을 당하고 있는데, 희망 고문이면 뭐 어떠냐..


어떻게든 나라도, 나라도 기억을 붙잡고 싶어서 앨범을 만들었다. 나라도 내 감정을 지켜야겠어서. 회상하느라 괴로움에도 써 내려갔던 소설, 영혼 다 갈아서 만든 앨범, 그때그때 떠오르는 감정들을 써 내려갔던 글들, 유튜브 영상들, 이것들과 함께라서 살아갔다.

한 사람이 잠깐 3개월 있었다가 없어져서 느낀 지난 1년 4개월의 감정이, 살면서 27년 동안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간관계에서 겪은 아픔을 다 합친 것보다 괴로웠다. 상대는 가만히 있었는데 내가 혼자 그러고 있었다는 게, 혹시 알게 되면 미안하다. 마음 불편할 짓 하기 싫은데, 나도 나를 예술로 표현하며 지키긴 해야겠고, 참 많은 때에 어쩔 줄 모르겠다.

확실히 감정 예측 오류가 아니라 맞는 예측이었다. 다음엔 여긴 이틀 정도만 숙박해야지... 아니지. 감정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는 한 오지 말아야지.


때론 어떤 것들은 희망 고문이 아니라 그냥 희망이다. 작년 12월, 졸업식 날 아침까지 난 걔가 소튼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살았다. 설렜다.


지금을 보라. 희망이 없으니까 고문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1 사우스햄튼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