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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 사랑

나를 깎아 만든 앨범

by 이가연

길가에 떨어진 낙엽을 코팅해서 보관하는 건 나름 괜찮다. 하물며 그 낙엽이 떨어질 때 내가 직접 손으로 잡은 거라면, 더더욱 의미가 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내가 지금 혹시 벌레가 파먹고, 모양도 예쁘지 않은, 그 어떤 낙엽과도 다를 바 없는 것을 소중히 코팅해서 액자에 끼우고, 받침대까지 세워 전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감정을 따라 툭하고 곡이 쏟아져 나왔던 경험들은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런데 그게 끝나지 않고, 계속 자꾸 뭔가를 입히는 느낌이 들었다. 웹소설, 브런치 글, 유튜브 영상, 그리고 기어이 앨범까지.


내가 발매한 이 앨범은 과연 다이아몬드 원석을 깎아 만든 진짜 다이아몬드일까, 아니면 길 가던 돌멩이를 그냥 열심히 깎은 걸까. 물론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나는 내가 만든 작품이고 감정이니 소중하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난 후, 과연 내가 이걸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하는 생각도 스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집착이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드는데엔 분명 타인의 입김도 작용할 거다. "네가 아깝다"는 둥 한국인의 오지랖 때문에, 오빠와 영국인 친구를 제외하고는 이 얘기 절대 안 하기로 다짐했다.


작년 2월엔 이틀 연속 저격송이 나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한테 욕 한마디 한다고 옅어지거나 사라질 감정이 아니다. 어차피 둘 다 살아 있는 한 인생은 모른다. 이 앨범을 당장 안 듣는다고 좌절할 생각도 없다. 언젠가 들을 걸 알아서. '아 이제 내가 성숙해지고 멀리 보는구나.'싶었는데, 문득 이렇게 생각하는 거조차도 엄청난 집착이면, 그게 더 무서운 일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앨범의 가치, 감정의 가치는 남이 판단해 주는 게 아니다. 이 앨범을 만들기까지, 영국에서 음악 석사 학위를 따는 수준의 노력이 들어갔다. 그게 이 앨범의 가치다. 오빠와 영국인 친구 둘만 합쳐도, 하루 최소 3번이라 해도 걔 얘기만 2천 번은 했다. 수천 시간의 마음을 썼다.


내가 갈고닦았던 게 낙엽이든 돌멩이든, 그렇게 품고 다듬은 시간과 노력 때문에 값진 낙엽이고 돌멩이가 된다. 이 앨범은 그냥 결과물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든 살아낸 시간의 기록이다. 앨범 첫 트랙을 썼던 작년 1월부터, 앨범을 완성해서 넘긴 이 순간까지도, 나는 많은 순간 괴롭고 속이 썩어갔다. 가족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나를 이렇게 만들 수 없었다. 아무리 가족 같이 친했던 친구라 해도 1/10도 비슷하게 못 봤다.


의미는 내가 만든다. 이 의미가 앞으로도 나를 지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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