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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이 말 걸 때

by 이가연

길 가다가 낯선 남자가 말을 걸길래 헤드폰을 벗었다.

대학생이세요?
아니요.
직장인이세요?
아니요.

여기서부터 이제 짜증 났다. 다짜고짜? 아니나 다를까,

저 뭐 권하려는 사람은 아닌데.

하자마자 갈 길 갔다. 그러곤 '아차'싶었다. 길거리에 말 걸려고 하는 사람들 무시한지 꽤 됐는데 유럽 갔다와서 나도 모르게 헤드폰 벗은 느낌이었다. 20대 초반 내내 나는 길거리에서 신천지와 도믿맨들에게 시달렸다.

한국 사람들이 내가 말 걸 때 안 받아주는 이유를 신천지와 도믿맨 탓으로 돌리고 싶지만, 그게 다가 아니란 걸 너무 잘 안다. 내가 뮤지션임을 밝히고, 내 명함까지 줘도, 한국인들이 벽치는 느낌은 정말 강하다. 옆 동네 일본인은 100% 받아주는데 도대체 왜 그럴까. 이제는 딱 두마디만 하고 포기하고 나도 갈 길 가지만, 그 두마디 하느라 이미 상처 받았다.

No pain no gain이지만, 내가 한국인에게 말을 걸었을 때는 PAIN!!!!! no gain이다. 몇백 명의 데이터다. 이제는 관상만 봐도 대충 안다고 생각했는데, 종종 틀릴 때가 있다. 한국에선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말 걸 일이 발생하지 않으니 당황하는 거다. 여긴 버스 기사, 카페 직원과 "Hi"를 하지 않는 나라이지않나.

외국인에게 말 건다고 다 'gain'은 아니다. 공원 벤치 옆에 앉아있던 사람에게 말 걸고 연락처도 교환해서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대로 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경우 '그럴 수도 있지'하며 넘기게 된다. 그런데 한국인처럼 면전에서 '나한테 왜 말 걸어. 아하하,,,'라는 느낌을 딱 받아버리면, 몇 시간 동안 기분이 좋지 않다. 덕분에 확실히 내가 자폐가 아니란 걸 알겠다. 상대방이 뻘쭘해하고 빨리 서로 갈 길 갔으면 좋겠단 걸 잘 알 거 같다. (이렇게 잘 알면서, 친구 관계에선 왜 이렇게 모를까 생각도 들었다. 숨겨서다. 숨기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나에 대한 자책으로 빠지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미 통계적으로 한국인에게 말 걸었을 때 나를 받아줄 확률이 극악이란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 말을 걸게 되는 건, ADHD 탓이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특성 덕에, 어디 가서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게 참 쉽다. 영국인 친구도 내가 먼저 조잘조잘 말 안 걸었으면, 연락처 교환도 못 했다. 되게 얌전한 애다.

'내가 왜 상처 받을 거 뻔히 알면서 한국 사람한테 말 걸었냐. 진짜 금붕어냐.'할 필요 없이, 이게 나다. 어차피 몇 분, 몇 시간 안 가는 상처다. 그리고 이렇게 세상에 알릴수록,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나처럼 말을 거는 사람을 만났을 때 '이 사람이 이렇게 말 걸기 쉽지 않았을텐데 성심성의껏 받아줘야지'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원래의 찐 E 텐션으로 다가오는 사람과, 나 같은 사람은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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