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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외국인이다

by 이가연

퍼즐 맞추기

ADHD에 좋다고 해서 퍼즐 맞추기를 샀다. 이거 뭐 당뇨에 좋다고해서 마늘을 샀다와 다를바 없는 문장인데 뭔가 웃기다. 500피스는 앉은 자리에서 차분히 못 맞출거 같아서 100피스로 샀다.



장애
'암 걸릴 거 같다'라는 표현을 쓰면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지적하고 다니진 않았다. 그러다 유튜브에서 'ADHD올 거 같다'라는 걸 봤다. ADHD는 뇌 자체를 갈아끼우셔야합니다만. 이러다가 본인이 뭔가 사회성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을 때 '자폐올 거 같다'는 말도 생겨날 판이다. 앞으로는 '암 걸릴 거 같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수정해 주겠다.

선택 장애, 결정 장애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ADHD가 신경 발달 장애임을 내가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게 내 의지의 문제인 줄 알고 험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고작 점심 메뉴 고르는 것에도 선택 disability가 생길 거 같다는 말을 쓰는 한국, 부끄러울 일이다.



독립 출판물

도서관에서 독립출판 책 한 권을 읽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나와 잘 맞으면 활자의 80%, 평균 50% 정도 읽는다. 그런데도 이 129쪽짜리 책에서 오타를 3번 발견했다. 귀여웠다. 퇴고와 편집, 디자인까지 전부 혼자 해야하는 저자의 마음을 안다.



외국인이다

전시회장에서 한국인이 나에게 영어했다. 이번엔 진짜 혼잣말로 영어 안 했다. 그냥 걸어가고 있었다. 하긴, 내 모양새는 전형적인 20대 한국인 여자를 벗어난다. 게다가 누가 이런 사진 찍는 전시회에 관광객도 아니고 혼자 오겠는가. 자랑스럽다. 앞으로도 그렇게 탈 한국인이도록.



싱어송라이터와 ADHD

테일러 스위프트도 ADHD다. 그녀가 한 인터뷰, 그간의 행적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많은 곡들이 상처를 준 사람에게 못다한 말이 마치 편지처럼 나온 것이라 한다. 나다. 테일러는 이것이 너무 날 것이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나도 똑같은 걱정을 한다.


혹자는 테일러가 맨날 남자 가지고만 곡 쓴다고 비판한다. 나도 똑같은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여자가 여자한테 상처받는 건, 그 정도까지 상처받을 일이 잘 없다. 또, 그냥 말하면 된다. 반면 남자는 말할 기회를 원천 봉쇄당했거나, 자존심 상하거나, 기타 이유로 속으로 삭여야 하는 경우가 많다.


싱어송라이터가 자기 얘기로 곡 쓴다고 다 ADHD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못 해서 흘러나온다'식의 표현이라면 충분히 ADHD를 의심해 볼 만하다.


나를 쓰다
미치도록 자전적 소설인 '이 사랑'을 정말 문학 작품으로 대하고 다시 한번 들여다볼까 하는 유혹에 휩싸였다. '나는 한국인이 싫다.'로 시작하는 거다. 자극적이면서도 사실이다. 그러면 배경을 한국에서 영국으로 바꿀 수 있다. 한국인이 힘들어서 간 영국인데, 영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게 한국인이었던 그 아이러니를 고스란히 담을 거다. 이왕 자전적 소설인 거, 등장인물 이름만 바꾸고 다 실화로 하면 뭐 안 되나. 그걸 썼던 작년 이맘때엔 이 정도로 나도 나에 대해 몰랐다. '이사랑'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확실히 파헤칠 수 있다. 할 수는 있는데 아직 자신은 없다.



불평

아는 게 없으면, 불평 불만도 없다. 한국 돌아온 이후로, 왜 이렇게 한국에 대해 불평이 많아졌는지 토로했다. 분명 서울에서 26년을 살았는데, 왜 갑자기 서울 사람들은 이렇게 다 불친절하게 느껴지는지, 부딪혔으면 사과를 해야하는데 다들 이런 상식도 없는 사람들인지,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 자체가 내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이라고, 몇 년 지나면 그런 걸 다 포용할 수 있는 그 다음 단계에 오르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


아는 게 많아진 거다. 다른 세상을 엿보고 왔는데, 내가 사랑하고 살고 싶은 내 나라는 이러니까 화가 나는 거다. 아는 게 없으면, 불평할 것도 없다. 예를 들어, 정치에 대해 무지하다. 그러니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욕할 게 없다. 그런데 영국은 이 색히들 이민자 막는다고 졸업비자도 2년에서 1년 6개월로 줄이고, 영어 조건도 강화하고, 전문 직종만 받으려고 한다고 욕한다. 영국은 '영국과 연결된다는 그 기분을 놓고싶지 않아서' BBC 뉴스를 들어가서 본다.


나도 내 스스로 보기에 자꾸 불평만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내가 점점 발전하는 사람이 되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아졌다. 난 이제 성별 체크할 때, 남자와 여자만 있으면 '기타 없냐 기타?'라고 꼭 한 번씩 생각하고 지나가야 한다. 일단 문제점이 보이는 것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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