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오디션 합격

by 이가연

여수 오디션에 합격했다.


이렇게까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한 경우는 잘 없었다. '잘 끝났으니 됐다'라고 마무리하더라도, 일말의 기대감이 남아있기 마련인데, 이번엔 정말 떨어진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기대를 안 했나. 그렇게 불합격이라고 확신한 것이 빨리 이 글을 쓰고 싶어 근질거리게 했다.


불합격이라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는, 보통 이런 공연팀 모집은 팀을 선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같아도 이왕이면 혼자보다 두세 명 같이하는 팀이 더 '있어'보이니까 고를 거 같다. 실제로 공연팀 모집에 정말 많이 떨어졌고, 어떤 사람들이 붙어서 공연하나 보니 다 팀이고 솔로는 없었다.


그런데, 솔로가 아니라 팀이 유리한 부분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번 오디션을 통해서 내가 어떤 점이 다른 팀에 비해 좋았는지, 앞으로 어떤 점은 보완하면 좋을지 생각해 봤다.




어떤 팀은 팝송 커버를 부르셨는데, 심사위원 분이 자작곡도 들어보고 싶다고 하셔서 했다. 그랬더니 심사위원 분도 자작곡이 더 듣기 좋다고 하셨고,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흔히 버스킹이라고 하면, 유명한 곡, 신나는 곡만 불러야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도 대기하면서, '자작곡 발라드 말고 인어공주 들고 올 걸. 며칠 전에 앨범 냈다고 타이틀곡 부르고 싶던 내 마음은 이해한다만. 분위기가 안 맞는 거 같은데.'라고 생각했다.


오디션, 버스킹 상관없이 어떤 장소건, 내가 나를 잘 보여줄 수 있으면 된다. 왕창 쳐지는 노래를 3곡 연달아 부르는 것도 아니고, 나를 온전히 보여줄 수 있고, 나도 몰입해서 부를 수 있는, 관객들이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노래를 1곡 부르는 건 어느 장소에서든 괜찮다.


이번에는 감사하게도 심사위원 분이, 영어로도 한 곡 들어보고 싶다고 하셔서, 인어공주를 무반주로 부를 수 있었다. 다음에는 시키지 않아도 내가 먼저 무반주로 짧게 하나 더 하겠다고 말해야 한다. 자작곡과 디즈니 노래는 완전히 다른 매력이고, 인어공주는 10초만 들어도 '이 사람은 이게 특기구나' 안다. '진정성 있는 따뜻한 발라드 자작곡'과 '진짜 인어공주 같이 부르는 인어공주', 크게 두 가지 무기가 있기 때문에, 둘 다 보여줘야 차별화가 생긴다. 처음에 부른 자작곡 1절 가지고는 합격하기 어려웠을 텐데, 무반주로 인어공주를 불러서 합격과 불합격 사이에서 애매했던 나의 위치가 합격 쪽으로 당겨졌던 것 같다. 엠알 혹시 더 준비된 거 있냐고 음향 쪽을 살피셨는데, 빠르게 무반주로 시작한 것도 잘했다. 무대 내려 가서 이거 틀어달라고 말하고 올라왔으면 모양도 빠지고 시간도 지체됐을 거다.


다른 팀은 "공연이 50분인데, 하게 된다면 레퍼토리 구성이 어떻게 되냐"는 질문도 받는 모습을 보며, '역시 나는 떨어지니까 저런 질문도 없었던 건가'싶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미 지원서에도 적어놨을 테고, 내가 말로도 디즈니 미녀와 야수 등 노래를 즐겨 부른다고 했다. 물어볼 필요가 없으니 안 물어보셨던 거 아닌가.


또한, 주변 다른 여자들과는 좀 다른 스타일이었다. 말 걸면 안 될 거 같은 센 언니 같은 분들도 계셨다. 오디션 장소가 공개홀이라고 해서, 야외에 조만하게 버스킹 장소처럼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완전 공연장이라 놀라기도 했다. 저렇게 센 조명받으면 지금 내 모습이 화장을 전혀 안 한 쌩얼로 보일 거란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원피스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제가 발이 안 좋아서 운동화에 평발 깔창을 넣고 다녀야 걸어 다닐 수 있어요."라고 말하고 다닐 수도 없다. 평소에 화장은 아예 안 하고 원피스도 안 입는데, 그 정도면 진짜 최선을 다 한 건데, 사람들은 절대 모르지 않은가.


쪼금 쫄았는데, '나는 나대로 하면 되지 뭐. 이제 와서 어쩔 거야. 곡을 바꿀 수도 없고, 내 모습을 바꿀 수도 없고. 그냥 지금 있는 그대로 나는 하면 될 뿐이야.'라는 생각을 더 크게 하고 있었다. 그게 잘한 점이었다. 인간이기에 슬쩍 쫀 거는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나는 나야'라는 생각이 더 강하다. 그래서 나의 수수한 매력이 보였을 거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말하는 목소리 톤, 노래하는 톤, 겉모습까지 다 똑같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미 그 슬쩍 쪼는 것도, 과거에 비하면 많이 사라졌다는 걸 느꼈다. 내 특기와 매력에 대한 확신이 생길수록, 다른 팀이 어떤 나와 상반된 매력을 가졌든 기죽거나 무섭지 않게 된다. 이번 합격을 통해서 '어차피 내가 잘하지도 못하는, 겉으로 막 치장하거나, 입 발린 말을 하거나, 신나는 곡을 해야 할 필요 없다. 내가 막 사막에서 진주 찾듯 어렵게 숨은 매력을 찾아야 되는 아티스트가 아니라, 이미 지금 하고 있는 거 그대로 보여줘도 잘 드러난다'는 걸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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