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DHD와 나

나 같은 사람도 어딘가엔 있어

by 이가연

나 같은 사람 만나야 한다.


예전에 한 친구의 얘길 듣고 충격받은 적이 있다. 지금 남자친구와 사귄 지 6개월쯤 되었는데, 자기는 몇 년 안에 반드시 결혼을 하고 싶은데 남자친구는 어떤 생각인지 모르겠다고, 남자친구가 생각 없으면 본인도 시간 낭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일단 첫째로, 그런 중대한 고민거리를 남자친구가 모르고, 한 번도 그런 얘기를 나눈 적 없다는 말에 충격받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오빠는 낱낱이 알고, 제이드도 어느 정도 다 안다. 나는 친구들도 싹 다 아는데, 애인이 모르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최근에 들어서야 인터넷 댓글들을 보니, 장기 연애라고 해도 그냥 밥 먹고 차 마시고 그냥저냥 데이트만 하다 보니까 장기 연애가 된 사람들도 많다는 걸 알았다. 나는 원체 '친한 친구'들도 목숨까진 아니더라도 뭐든지 다 바칠 마음으로 지내기 때문에, 애인이라면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


둘째로는, '시간 낭비 하고 싶지 않아서'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남자친구가 결혼 생각이 없다면 지금 하고 있는 연애가 시간 낭비로 느껴진다는 뜻인데, 정말 세상 사람들은 그냥 '좋아한다'의 감정 만으로 연애 유지가 되는구나 싶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좋아한다'의 감정으로는 한두 달 만에 '모두' 정 떨어져서 끝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냥저냥 유지가 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영혼의 짝처럼 느끼는 경험'을 못해보고 사는 것으로 느껴진다.


구남친 중에서, 내가 고백을 했을 때 본인은 결혼할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처음에 거절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러곤 며칠 뒤에 사귀게 되었는데, 그때 들은 말 중에 나와 만나는 게 시간 낭비는 아닐 거 같다고 했던 말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말이지만, 그때는 그게 나를 엄청 높이 평가해 주는 뉘앙스로 해서, 좋게 느껴졌었다. 이런 식으로 '나는 결혼을 빨리 해야 하는데, 이 사람을 만나서 시간 낭비면 어떡하지.'라는 마인드가 만연한 사회라면, 똑같이 어른이지만 어른이 아닌, ADHD가 아니면 누굴 만나기가 어려울 거 같다.


걔는 나에게 지금 나와 이렇게 지내는 것이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단 말도 했었다. 내가 울고 불며 그래도 내가 필요할 때가 있지 않겠냐고 했을 때, 절대 그럴 일 없다고 했다.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서 나의 필요 가치가 생겨서 나에게 오면 그래도 내가 행복하고 좋나. 내가 그토록 혐오감을 느끼고 한두 달 안에 정 떨어지는 전형적인 한국인이 아닐 거라고 믿고 싶어서 걔가 ADHD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내가 옷 입는 거 다 마음에 안 든다고, 옷장 다 별로라고 했을 정도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이 충돌하는, 치를 떠는 한국인 맞다. 그냥 처음으로 내 '마음'이 그걸 이긴 거뿐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나 같은 사람이다. 내가 잘 지낼 수 있는 사람도 나 같은 사람이다. 나는 돈이 있건없건, 장애가 있건, 어떤 환경에 놓여있건, 마음 하나로 뛰어드는 사람을 원한다.


사람을 대할 때, 진심 빼면 시체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만이 내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이다. ADHD는 입 발린 말도 못 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과 안 하면 좋을 말도 그냥 나오고, 사회적 눈치가 결여되어있다고 하는데, 그거 다 그냥 순간순간 진심 이어서다. 비 ADHD인들이 가면 쓰고 살아간다면, ADHD인은 있는 그대로 살아가서다. 그래서 비 ADHD인에게 자꾸 상처받고, 열받고, 그 사람들도 내가 이해가 안 되니, 어울려 살기가 서로 힘들다.


난 누군가를 위해서 앨범도 냈지만, 사실상 그 사람이 내가 원하는 사람,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비 ADHD인이면, 내 앞에서 어떤 가면을 썼을지, 어떤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난 그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내가 '너를 위한 앨범이야'하고 낸 사실이 어이가 없을까. 왜 이러나 짜증 날까. 그것만 확실하다면, 나 ADHD는 정말 순식간에 감정이 0이 될 수 있다. 비 ADHD인과 다르게, 정말 한순간에 딱 사라진다. 그렇게 없던 일처럼 행동해서 비 ADHD인이 믿지 않거나 황당해하는 걸 좀 봤다.


문제는 그걸 알 방법이 없다. 눈치로 '지금까지 무반응이면 무시다.'라고 받아들일 수 없다. 직접 말해줘야 된다. 그것만 확실하면 나는 0이 되는데, 내 마음이 너무 큰 거 같아서 도저히 어떻게 건드려야 할지 몰라서 아무 말도 없는 거라면 안타깝다. 난 보통 사람이 아닌데. "오케이. 고맙다."하고 바로 생판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데.



ADHD 유병률이 5%라고 한다. 이걸 알기 전부터, 한국인 95%가 날 짜증 나게 한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소름 돋게 일치해서 놀랐다. 1%보단 낫다. 찾아보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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