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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 사랑

마음속에 저장

by 이가연

기억은 자꾸 들여다봐준 만큼 각인이 된다.


2022년 여름에 2주 동안 혼자 LA를 다녀왔다. 가자마자 전부 백인들 틈에 섞여서 일주일 동안 음악 캠프도 마쳤다. 2주를 다녀왔지만, 무대에 올라서 노래한 날만 거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다. 무대 영상을 유튜브에도 올리고, 그 해엔 여러 번 돌려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무대는 분명 LA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너무 벅차서 혼자 학교 화장실에서 울었다. 당시 태어나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고 하면 그날이 무조건 들어간다고도 했다.


하지만 2025년인 지금, 그날의 감정이 생생하게 떠오르진 않는다. 꾸준히 곱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훨씬 강렬한 순간들을 여럿 겪었고, 영국 가기 직전에 핸드폰을 바꾸는 바람에 LA 사진과 영상들을 자주 들여다볼 기회도 줄었다.



반면 2023년 9월 영국 유학을 시작한 후의 일들은 지금도 선명하다. 글을 수차례 고치고, 사진을 고르고 배치하며 책 한 권을 완성했다. 그렇게 '장학생 파티', '펍 오픈마이크'와 같은 이벤트들이 '곱씹음'을 통해 각인이 되었다. 긍정적인 각인이다. 그래서 '2023년 11월에 뭐 했더라? 2024년 5월에 뭐 했더라? 하면 머릿속에 쭉쭉 재생되는 느낌이다. 책에 담겨있는 한, '아, 5월엔 학교 시상식하고 마지막 수업이 있었지.'하고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문제는 아픈 각인이다. 난 아직도, 누가 1년 반 전에 한 말이 머리를 스칠 때면 아직도 가슴이 '비행기가 갑자기 하강할 때'처럼 쿵 내려앉고 쫙 찢긴다. 똑같은 말이 그렇게 오백 번씩 울리는 거, 이건 내 의지와 무관한 침습 현상이다. 책을 편집하며 기억이 다듬어지는 건 내 선택이지만, 이건 아니다. 그래서 이런 플래시백이 줄고, 대신 행복한 자발적 회상이 많아지면 좋겠다.


정말 좋은 경험을 했다면, 사진을 찍고 글을 남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기억을 다시 꺼내보고, 들여다보고, 곱씹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기억은 부정확하고 그게 왜곡되었단 사실조차 모를 때가 많다. 내가 좋게 기억하는 날에도, 사실은 불쾌했던 순간들도 있었을 거다. 그래서 웬만하면 여행기를 쓸 때, 그런 자잘한 불쾌감은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결국 기억은 내가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남는다.


행복했던 순간은,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끔 들여다봐야 한다.




라고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서 깨달았다.


어쩌면, 플래시백이니 침습 현상이니 아프다고 하지만, 무의식은 그 기억을 잊지 않고 싶어서 발악하는 거 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생생한 기억이 휘발되는 게 싫다고 신체화 증상도 팍팍 나는 거 참으면서 웹소설로 남겼던 사람이다. 그거야말로 가장 강한 의지였다.


많은 사람들은 나처럼 그렇게 침습 현상을 겪지도 않고, 글을 쓰든 노래를 하든 예술로 과거의 경험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배고파. 힘들어. 출근하기 싫어." 따위의 말만 반복하는 사람보다 어떤 기억이든 혼자 여러번 새길 줄 아는 사람은 '장인' 같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쉽게 잊혔을까. 그들이 내가 겪은 스트레스의 조금도 겪지 않고 가뿐히 살지언정, 훗날 역사에 남을 사람은 내가 될 거 같다. 나를 조금 더 아름답게 바라봐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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