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이 사랑

감정과 기억력

by 이가연

기억력이 좋다. 특히 숫자에 강하다. 2016년부터 지금까지 열 차례 앨범을 발매한 날짜라든지, 나에게 있어 중요한 날짜들을 잘 기억하고 있다. 얼마 전엔, 영국에서 쓰던 핸드폰 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신기했다. 안 쓴 지 한참이니, 진작 잊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전부 감정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 앨범은 하나하나 소중했기에 날짜를 기억하는 것이 당연하고, 영국 번호도 마찬가지다. 기억은 뇌가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면 영화 인사이드아웃에서 구슬을 버리듯 버린다. 그러니 과거에 했던 연애는 그 누구의 생일도 기억나지 않고, 몇 월에 시작해서 몇 월에 끝났는지도 기억 안나는 경우도 있다.


기억력이 좋다는 걸 믿고 재밌는 경험도 했다. 작년에 걔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몰라서 구글링이 하고 싶었다. '대학은 어디 나왔었더라?' 기억 안 났다. 거의 1년 전에, 스치듯이 본 이력서에 쓰여있던 학교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나.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단서가 있었으니, 1년 전에 봤을 때 '미안하지만 처음 들어봤다. 이건 얘네 지역 학교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상도에 있는 4년제 대학교 리스트를 전부 보면 그중에 기억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본 게 영문 이력서이기 때문에, 영문으로 적었을 때 글자수가 간단하지 않은 느낌이었단 것도 기억했다.


예상대로 좀 생각하더니 알았다. 그런데 맞췄는지는 어떻게 아나. 학교, 이름 검색하니 나에게 자랑했던 수상작 영상이 떴다. 멍하니 '다른 팀은 목소리도 들어갔던데 왜 너는 없냐'며 영상을 보던 작년 나의 신세는 처량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다.


결국 감정이다. 남들보다 감정을 깊게 느끼기 때문에, 그만큼 뇌에도 새겨진다. 처음부터 영화 한 장면처럼 저장이 되고, 그 장면이 수백 번 머릿속에서 상영되기까지 한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이 괴로웠는데, 그렇게 수백 번 상영이 되어야 그에 맞는 사운드트랙이 그때그때 생각나던 게 아니었을까.


창작 활동을 왕성하게 했던 것은, 생생한 기억력 덕분이다. 그 기억력은 마음 때문이다. 마음은 사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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