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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셀프 가스라이팅

by 이가연

셀프 가스라이팅

간혹 충분히 비ADHD인도 짜증나고 화날 상황에서, '내가 ADHD라서 그런가'하곤 한다. 이 얼마나 억울한가. ADHD라서 그러든, 혈액형이 AB형이어서 그러든, INFJ라서 그렇든, 내가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남들보다 소리에 예민할 수 있다. 주의력 분산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감정 조절이 안 될 수 있다. 비 ADHD인이면 뭐 다 감정 조절을 잘 하나. 내가 조금 더 불가항력적으로 어려울 뿐이다.


내가 기물 파손을 한 적이 있나, 사람을 폭행한 적이 있나. 범죄의 근처도 간 적이 없다. 아무리 증상이 심하게 발현되더라도,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면 다 받아줄 수 있는 정도였다. 오빠를 만난 이후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인간 관계란 쌍방이기 때문에 과거 모든 트러블은 다 상대방도 불건강했기 때문이란 걸 알았다.

최악의 경우, '너가 예민한 거야.'하고 가스라이팅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기에 위험하다. 지금은 아주 셀프 가스라이팅하는 꼴이다.



그때그때 진심임

작년 6월 영국을 떠날 때 친구에게 진짜 앞으로 10년은 안 올 거라며 씩씩거리며 갔다.

8월에 다시 왔다.


올해 5월엔 이제는 진짜 일 년에 한 번 정도 올 수 있을 거 같다고 했다.

응 9월에 간다.


그때그때 느끼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그때그때 진심이고 진실이다. 그 어떤 경우도 진심이 아닌 적 없었다. 양엄마(오빠)에 의하면, 내가 말하는 거 80%는 걸러 듣는다고 한다. 현명하시다.



오히려 좋을 걸

내가 짜증이나 화가 났을 때는 그 이유가 명확히 얼굴에 써있다. 흔히 SNS에서 여자가 화난 이유는? 물으며 도저히 남자는 여자 속을 알 수가 없다는 농담들을 본다. 사람을 미쳐버리게 만드는 건 아마, 도대체 얘가 왜 화난 건지 모를 때일 거다.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 예민한지, 지뢰 버튼이 있는지 안다. 그 부분은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소중한 사람에게 내 생각과 감정을 그때그때 상당히 잘 설명하는 편이다.


그러나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세상 몇몇 사람들은 그냥 짜증 내고 싶을 때 짜증 내고, 화내고 싶을 때 화 낸다. ADHD가 있단 이유로, 어쩌면 나는 나를 과하게 컨트롤하려는 지도 모른다.



모솔
연애 기간 100일 이하는 모솔로 인정해줘야한다. 그래도 연애 한두달이라도 해보지 않았냐고?

커플템 한 번도 해본 적 없음
기념일 한 번도 있어본 적 없음
크리스마스, 발렌타인데이 다 애인 있어본 적 없음
애인과 여행 가본 적 없음
애인의 친구에 대해 들어본 기억도 없음
연애에서 좋았던 기억이 단 한 개도 생각나지 않음
지나가다 마주쳐도 못 알아볼 자신 있음
이름도 몇 초 생각해야 기억났음

그냥 시원하게 모솔로 인정해주세요.



7월 22일 점심 무렵

내 영혼의 짝아. 지금 많이 슬프니. 너무 이상해. 이유를 알 수 없어. 하늘을 바라보는데 구름이 너무 예뻐서 눈물이 났어. 그러곤 핸드폰 좀 하다가 방에 들어와서 또다시 창밖을 쳐다보는데 또 눈물이 주륵주륵 났어. 내가 아무리 반평생 정신과 단골손님이었다해도, 하늘을 보고 구름이 예쁘다고 눈물이 막 날 순 없어. 이건 정말 아무 이유가 없어. 감정을 연결해서 느끼는 느낌이야. 슬프지 마라. 내가 대신 느끼는 거라면 기꺼이 그럴텐데, 동시에 느끼는 것이라면 너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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