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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 사랑

침습 현상

가장 큰 고통

by 이가연

지난 1년 동안 나를 가장 힘들게 한 증상은 '침습 현상'이었다. 매일 예측할 수 없이 특정 사람에게 받은 상처의 장면과 대사가 떠오른다. 지난 1년이 넘도록 이 현상만 없었어도 나는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았다. 상대방이 1년 8-10개월 전에 한 말을, 길을 걷다가도 확 생각이 나서 상처받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말이 한 열댓 개 되는데, 대략 15개라고 쳐도 15X300만 해도 4500번을 상처받은 거다. 나도 이게 과장이면 좋겠는데, 올해가 아닌 작년을 생각하면 각각 300번도 최소 수치 같다. 그게 ADHD의 뇌다. 하루에도 천 가지 이상 생각이 나기에, 그중 일부는 하루에도 자주 그래왔다. 이게 나를 당장 영국 가지 않으면 숨 막히게 해 왔다. 이것만 해결되면 이렇게 자주 영국에 갈 필요도 없고, 영국 갈 걱정에 경제적 걱정할 필요도 없고, 우울증 약 먹을 필요도 없다. (영국만 안 가면 돈 있다. 돈 있는 백수인데 이렇게까지 괴로운 게 너무 억울해졌다.)


상대가 실제로 사과할 만한 부분은 15인데, 내가 스스로 매일매일 통제할 수 없이 반복해서 상처받아서 5000이 된 느낌이랄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반복되고 더 커진다. 혹자는 '너가 그렇게 글 쓰고 노래하니까 더 생각나는 거 아니냐'라고 할 수 있는데, 생각 나서 미칠 것 같을 때마다 하나씩 쓴다. 그런 표현 수단이 없었으면 진작 병원에 입원해 있었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길 가다가도 "그렇게 티를 냈는데 너가 그것도 눈치를 못 챈 거 아니냐" 같은 말이 확 생각날 때면, (정말 아직까지도 타이핑하는데도 앉아서 비틀거리는 느낌이다. 이 글 쓰지 말 걸 그랬나), 확 잠시 동안 아프다. 그게 상식 선에서 이해하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너무 너무 많이 쌓였다. 이미 내 영혼은 몇 번이고 죽었다. 하루에 카톡을 300개도 남겨왔던 오빠조차도 이게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오빠에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침습은 90% 이상 속으로 혼자 삭힌다.



나는 평생 ADHD 뇌를 달고 살아왔는데, 왜 이런 사람이 처음인가. 가족도 침습 현상이 안 일어날 수가 없다. 가끔씩 가족들이 과거에 나에게 한 잘못들이 생각난다. 그런데 가족들은 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좋은 모습, 감정도 느낀다. 쉽게 말해, 과거 엄마가 나에게 한 말이 확 생각나서 상처받더라도,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주면 그 생각에서 휙 빠져나올 수 있다. 그 전환만 되면 된다.


그런데 이 상대는 가족만 가능한 수준의 상처를 남겨놓고 나를 차단하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남자고 여자고 나에게 상처를 줬던 사람이 왜 없겠는가. 혹자는 너가 친구도 애인도 없으니까 시야가 좁아서 계속 곱씹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원래도 친구도 애인도 없었는데 이런 침습 현상에 시달려본 적이 없다. 성인이 된 2016년부터 항상 그랬고, 이례적으로 영국에서 영국인 친구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나며 놀았다.


상처를 받는 수준은 쌓았던 관계성과 비례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남자를 짝사랑했는데, 그 사람은 원래도 내 전화를 열 번 걸어도 열 번 다 안 받은 사람이라 치자. 그 사람이 "작작 전화해라. 전화하지 마라."라고 했다고 해서, 영혼에 상처로 남지 않는다. 몇 주 뒤면 얼굴도 기억 못 한다. 특히나 남자는, 어떤 상처를 줬어도 '금사빠 금사식'에 의거, 정말 미친 속도로 잊어왔다. 훗날 몇몇 대사가 기억이 난다고 한들, '기분 나쁨'에 그친다. 가족이고 전 애인이고 전에 친했던 친구고 대체로 그런 '기분 나빴던 경험' 수준이다.


그런데 거의 2년 전에 들은 말을, 아직도 가슴에 화살을 팍 맞듯이 느낀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했기에, 중요하기에, 항상 가족과 비교가 되는가. 상처를 받은 정도, 그 동시에 따뜻함을 느낀 정도, 믿고 의지한 정도, 그냥 갖가지 감정들이 엄마, 아빠, 동생 다 한데 섞인 느낌이다. 살면서 내가 이 사람 대신 죽어도 좋다라고 느낀 건 동생이 유일했는데 걔도 포함이다 이제.


진작 병원과 이 '통제할 수 없는 생각' 문제를 상의했지만, 시도했던 약이 잠을 빨리 재우는 것 말고는 효과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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