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도 봤던 드라마를 갑자기 시즌 4부터 보기 시작했다. 매 화마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울림이 느껴져서, 문득 대사를 통해 느끼는 점을 적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도 한국,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대사를 받아적어본 적이 있지만, 그건 여자 독백 연습을 위해서였다. 이번엔 '드라마 테라피'를 스스로 해보면 어떨까 싶다.
장면 1. 두 여자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웨딩드레스를 붙잡고 놓지 않고 있다. 끝까지 붙잡고 있는 사람이 결혼식을 위한 상금 10만 달러를 가져간다. 급기야 한 여자는 드레스를 붙잡고 있다가 기절하여 수술에 들어간다.
환자 : 그럼 누가 이겼죠? 그쪽이 기절했으면 내가 이긴 거 아닌가요? 심판은 어디 있죠?
의사 : 이틀 동안 옆에 서 있던 여자가 거의 죽을 뻔 했어요. 당신은 방금 수술에서 깨어났고요. 그런데 고작 생각한다는 게 대회에 이겼냐는 겁니까? 모르겠어요? 결혼식 때문에 열심히 노력할 게 아니라 결혼생활을 위해 노력해야 해요. 가끔은 그것도 쓸데없지만. 가끔은 놓을 줄도 알아야 해요. 놓아요, 알았죠? 당장 놓으란 말이에요!
환자 : 그래도... 내가 이겼나요?
나도 피투성이가 된 드레스를 미련하게 붙잡고 있던 건 아닐까. 의지가 너무 강하고 나를 아끼니 제이드와 오빠는 나를 지지해준다. 그건 내 마음이 더 아프지 않기를 응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내가 드레스를 붙잡고 있는 그대로, 내가 기절하지 않게 말을 걸어주고, 붙잡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공감해주는 거다. 그리고 그 둘을 제외한 세상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사람들이 한심하게 생각한 것처럼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드라마에서처럼, 드레스 붙잡겠다며 수술을 거부하는, 자기 생명도 안중에 없는 모습은 안 보였기 때문에 그들이 지지하는 것이지, 그 선을 넘는 순간 '당장 놓으란 말이야!'가 나올 수 있다. 물론 나도 나를 아끼는 마음이 매우 강해서 그 말을 듣기 전에 놓을 것이다.
장면 2. 3.6km에서 낙하산을 못 펼친채 떨어졌어도 살아난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남몰래 좋아하는 여자가 있고, 그걸 의사가 알게 되어서 의사가 하는 조언이다.
환자 : 저랑 같은 마음일 리 없어요.
의사 : 같은 마음이 아니면 미련 없이 떠나야죠. 하지만 확인하지 않으면 평생 상처가 됩니다.
내가 드레스를 붙잡고 있는 건 나랑 같은 마음이 아니란 걸,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에게 얼마나 역겨운 말인지 아냐고도 했다. 1년 반 전이다. 그 말이 진심이었으면 내가 그렇게 듣고앉아있었을 리 없다. 보라. 진심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크니까 벌어진 지난 1년 반의 기다림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를 여자로 봤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내가 남자 동생이었으면 그럴 수가 없는 것들이 있었다. 내가 벗고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토할 거 같다고까지 했는데, 표현이 너무 과했다. 아무리 내가 남자친구가 있는 상태라고 역지사지를 해봐도, 그렇게까지 과하게 말할 이유가 없다. '지도 찔려서 그런 거야. 나한테 다 뒤집어씌우고 진짜 비겁한 거야.'라는 생각을 1년 넘게 멈출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확실하게 알아야한다.
장면 3.
여자 : 오늘 밤 뭐해요?
남자 : 그 말은?
여자 : 오늘 밤에 뭐 하냐고요.
남자 : 난 좋은 남자가 아니야. 난 데이트 안 해. 다음날 전화도 안 하고, 진지한 관계는 질색이야. 잘해줄 자신도 없고 솔직히 난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섹스뿐이야. 당신 같은 여자는 그걸로 만족할 수 없을 거야.
난 저렇게 들었으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했을 거다. 그러면 나는 며칠 뒤에 저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했나 싶을 정도로 잊는다. 그동안 내가 짝사랑했던 남자도 다 저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남자에게 연락하는 건 정말 주체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남자 눈에 다 보인다. 고백이 필요 없다. 겨우 한두달이었지만, 그 한두달도 나의 소중한 인생 아닌가. 남자가 저래주면, 며칠이면 되었다. 저게 상처 주는 말로 보이는가. 아주 바람직하고 다들 배워야되는 의사표현이다.
안 저런다. 왜냐하면 나쁜 사람이 되기 싫기 때문이다. 꼭 내가 짝사랑했던 사람들은 카톡 답장은 해줬다. 그러니 하염없이 기다리고 떡밥을 받았다. 그게 훗날 돌이켜생각했을 때, 아주 가치 없는 마음이었고 시간 낭비였어서 내가 그랬다는 사실이 기분 나빴다.
예를 들어, 얼굴 빼고는 마음에 드는 게 단 하나도 없는 줄도 모르고, 하루종일 미쳐 날뛰었다. 본인이 그 정도로 가벼운 마음이라는 거를, 그 당시에 인지를 못 하니 문제다. 한 사람 때문에 일상이 마비되기 때문에, '이 사람은 나를 순식간에 마비시킬 정도로 영향력이 크구나'에만 온통 쏠려있다. 그래서 제발 남자가 저렇게 말해줘야 한다. 제발 내가 밥 먹자는 말 두 번만 해도 저래야 한다.
출처 :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4 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