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책 이야기

비트겐슈타인의 말

엮은이 시라토리 하루히코 I 옮긴이 박재현 I 인벤션 출판사

by 이가연

10. 상식을 꺼내 들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마라.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달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문제의 해결에는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문제의 늪에 흠뻑 빠져 발버둥칠지라도 필사적으로 싸워라. 그리고 마침내 승리하여 자신의 힘으로 그 늪에서 기어 나와라.


'다른 사람을 만나려는 노력을 하면 좋아진다'는 상식으로 나도 해결하려고 해 봤다. 그러니 정작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서, 카페 갔다 밥 먹고 카페까지 갈 정도로 마음에 드는 만남을 하고도, 강남역에서 집까지 걔 생각나는 노래 틀어두고 울면서 걸어왔다.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은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사람들을 달랠 수는 있었다. 그렇게 노력하니까 더 역효과 나서 '얘 아니면 안 되겠다'는 믿음만 콘크리트가 됐다고 사람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실제로 문제 해결에는 근처도 못 갔다. 문제의 늪에 빠져 발버둥 치고 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내 심장을 도려내어 꺼내 글을 쓰는 방식으로 이겨나갈 것이다.


29. 우리는 때때로 묘한 편견을 갖는다. 예컨대 장조 음악보다 단조 음악이 훨씬 구슬프게 심금을 울린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슈베르트의 음악은 장조 곡이 단조 곡보다 더욱 비애로 가득하지 않은가.


오빠가 나를 종종 슈베르트 같다고 했는데 신기하다. 내 노래 중에 '그런 너라도'가 떠오른다. 유일하게 발랄한 멜로디를 가진 곡인데, 누군가는 1집에서 그 노래가 제일 슬프다고 할 수도 있다.


43.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한다. 밤새도록 그리워한다. 그러나 현실 속 상대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과 조금 동떨어져 있다. 머릿속에 끊임없이 맴도는 상대는 자신이 해석하는 상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맞다. 그 이유로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건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자식을 짝사랑하는 경우, 자식이 부모를 짝사랑하는 경우도 세상에 존재한다. 그것도 사랑이 아닌가. 부모도 자식을 가장 잘 안다고 착각한다.


48. 상식은 과거의 경험에서 나온다.


나를 상식적으로 이해 못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95%와 다른 뇌로, 다른 행동과 경험을 왕창 하고 살아왔다. 그게 내가 남의 조언이 절대 사절인 이유다. 그들은 직접, 간접적으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종 나에게 조언하는 걸 허락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모두 ADHD 성향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55. 말하는 방법이나 표현이 서툴러서가 아니라 말 자체가 사물이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데 빈약한 구조를 갖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크게 실망할 필요 없다. 말이 이런 식으로 사물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데 부족하다는 걸 잘 헤아려, 상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쪽에서 짐작해 내는 친절한 마음이 중요하다.


상담받던 당시, 나의 단어 선택이 종종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어떤 상황들이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이제는 상담사도 없고 애초에 다른 상황에서 응용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설령 오해가 될만한 단어 선택을 한다고 한들, 제대로 나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그런 단어 한두 개 가지고 오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그런 사회적 신호를 읽기 어렵고, 충동적으로 그때그때 말이 툭툭 뱉어져 나오는 게 불가항력이라는 걸 이해하는 친절한 사람들만 만나고 지내면 된다.


나를 바꾸려던 노력이 너무 고문이었다. 종종 생각나는 상처 중 하나가, 신찬성이 너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 없냐 그래서 내가 너무 힘들다고 엉엉 울었던 거다. 어쩌고 저쩌고 했던 건 기억이 안 나고, 딱 그 대사가 기억난다. 내가 어찌 살아온 줄 알고 억울하고 답답해서 심장에 확 박혔기 때문이다.


상담사도 그 정도로 안 밀어붙이는데 네가 왜 그러냐고 했다. 당시에도 가장 이해받고 싶던 사람이라 그렇다. '얼마나 힘들게 나를 고치려 살아왔는지 조금도 알지도 못하면서 매우 힘들게 한 건데, 내가 그런 걸 절대 봐주는 사람이 아닌데 왜 그랬을까... 보통 그런 말 들으면 사람을 말로 반 죽여놓았지... 속상해서 울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에휴 사랑해서였지 왜겠어...'라는 생각이 무한반복이다.


58. 비록 현실이 그곳에 있어도 적절한 말을 가져올 수 없다면,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따라서 누군가의 침묵을 두고 할 말이 없다는 증거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말로 간단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인지 모른다.

68.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말 대신 침묵으로 표현할 수 있다.


누가 또 생각난다. 내 노래를 듣고 글을 읽었다면 할 말이 많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가족 중에 이미 공대 남자가 있어서, 친할머니도 경상도 사람이라 알겠어서, 완전 감정 묻어두는 사주여서, 회피와 내향의 상징 인프제였어서, 혹시 '도저히 말로 뭐라 표현할 수 없어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서울 여자라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배경화면은 내가 요즘 푹 빠진 오리들이고 나와 신찬성을 그 오리들에 대입해서 AI로 이미지 생성하고 있다. 이번엔 라벤더팜에 있는 오리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래도,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