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해봤던 일일봉사 중에 제일 재밌었다.
라디오 스튜디오 체험 프로그램을 시각 장애 아동의 보호자처럼 함께하는 역할이었다. 다른 아동들은 엄마와 함께 참여했다.
봉사자가 두 명이었는데, 나는 아동과 1대 1로 매칭해 주셨다. 다른 봉사자 분은 매칭 아동이 없어 사실 할 일이 거의 없어 보였다. 가끔 이런 일일 봉사를 가면 내가 할 일이 딱히 없는 난감한 경우도 종종 발생했었는데, 운이 좋았다. 봉사 신청할 때 나는 기존에 시각 장애인 복지관에서 봉사도, 강의도 해봤다고 말한 덕을 봤다.
원래 6살 아이라고 전달받았는데, 초등학교 5학년 아이였다.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친구가 나와 다른 선생님이 유니폼이냐고 물어봤는데, 그러고 보니 상의 색깔이 검은색이었다. 시각 장애인도 다 시력이 다르다. 이 친구는 색깔 인지가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내가 영국에서 대학원도 나왔다고 하고, 라디오 DJ도 했었다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영국 학교 급식하고 한국 급식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봐서 순간 말문이 막혔는데 재밌었다. 급식은 없고 중국 음식, 스페인 음식 같은 거 사 먹었다고 얘기해 줬다.
나 같은 사람들은 좋은 향이 난다는 얘기도 해줬는데, 나 같은 사람이란 말이 노래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다만, 향수 좀 더 뿌리고 올 걸 그랬나 싶었다. 그래도 안 뿌리고 나올 때가 대부분인데 봉사 간다고 대충이라도 뿌려서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각 장애 아동과의 만남은 처음이었다. 보통 초등학생 대상 봉사를 즐겨하는데, 예전에 가본 건 성인 시각 장애인 자조모임 보조 봉사였고, 복지관 칼림바 수업도 성인 대상이었다.
성인은 팔꿈치 뒤를 잡고 같이 걸어서 이번에도 그러려는데, 아이가 손 잡고 가도 되냐고 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성인이니 그랬던 거지 아이는 손 잡는 것을 좋아하니 오늘 하나 배웠다.
메인 활동은 라디오 스튜디오에 아이와 같이 들어가서 헤드폰을 쓰고, 마이크 앞에서 짧은 라디오 방송을 하는 것이었다. 그전에 미리 대본을 주시고, 아이랑 같이 뭐라고 얘기할지 상의했다. 대본에는 아이가 듣고 싶은 노래를 선곡하고, 장기자랑하는 타임도 있었다.
듣고 싶은 노래 물어보니 선생님 노래 듣고 싶다고 해서 고마운데 난감했다. 아이가 주인공인데, 봉사자인 내가 너무 드러나는 거 같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장기자랑도 안 하고 선생님이 노래하라고 해서, 내 노래를 틀든지 내가 노래를 하든지 둘 중 하나만 해야 할 거 같은데... 결국 둘 다 하게 됐다. 편하게 아이가 했으면 좋겠는데 눈치 보였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막 되었다. 3초 이상 정적이 생기면 실제로는 방송 사고인데, 아이들은 한참 정적이 일어나든 문장을 제대로 끝맺지 않든 정말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나는 아무래도 다른 보호자들처럼 아이랑 온 엄마가 아니라, 처음 만난 아이이고 봉사자라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부담감이 좀 있었다.
사실 내가 민폐가 될 일이 생길 리 없고, 아이를 예뻐하고 열심히만 하면 충분한 건데, 잘하고 싶은 욕심에 부담감이 생겼던 거 같다. 왜냐하면 두 시간쯤 지났을 무렵부터 '내가 사회적 가면을 계속 쓰고 있을 때 나타나는 특유의 어지러움'이 나타났다. 그래서 보통 봉사도 두 시간을 하는데, 이번엔 세 시간짜리였다. 이런 어지럼증, 피로감은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세 시간만 사회 활동해도 집 가는 길부터 막 어지럽고 두통이 일 때면, 도대체 하루 세 시간 돈 벌고 어떻게 살까 싶다. 안 아프려면 두 시간이다..
일일 봉사의 아쉬운 점은 두세 시간 동안 애랑 그래도 좀 친해졌는데 하루로 끝이라는 거다. 매 봉사가 끝날 때마다 느끼지만, 내 뇌가 봉사하는 시간 동안에는 거기에만 몰두해서 다른 잡생각이 전혀 안 든다. (ADHD 하이퍼포커스다. 그래서 뇌 과부하로 두통인 거 같다.) 문 밖을 나오는 순간, 바로 어제 생일을 어떻게 보냈는지부터 생일뿐만 아니라 하루하루가 어떤지 현실감이 확 든다.
그래서 하루에도 한두 번씩 봉사 사이트를 뒤적이고, 막상 당일에 가기 귀찮고 싫어도 어떻게든 간다. 이 마음이 하늘에 닿아... 더 재밌는 봉사도 만날 수 있고, 세 시간 정도는 뇌 과부하 오지 않고 편안할 수 있고, 봉사 말고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