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레퍼토리

by 이가연

ADHD 성향은 선곡에서도 드러난다.


ADHD는 역설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냥 내가 호불호가 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뇌의 작용이었다. 아예 시작 못 하거나, 무언가에 미쳐서 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처럼, 노래도 마찬가지였다. 한 노래를 10년, 17년씩 공연에서 불러도 질리지 않는다. 브루노 마스의 'When I Was Your Man'을 부른 지 벌써 10년이었다니, 시간도 참 빠르다. 인어공주는 2007년(초4)부터, 미녀와 야수는 2008년(초5)부터 불러온 노래들이다.


석사 과정을 통해서 레퍼토리를 좀 많이 늘려올 줄 알았다. 졸업 공연이 50분인 거 미리 알았다. 그런데 그걸 자작곡으로 절반을 채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졸업 공연을 한 작년 9월, 사랑에 미쳐 돌아있던 시기이기도 해서 그렇다.) 그전까지 5년 동안 1곡 썼으니, 영국 가서 그렇게 곡을 많이 쓸 거라고 상상이라도 했겠나. 그래서 원하던 목표인 '레퍼토리 늘리기'는 반은 성공, 반은 실패였다. 자작곡도 결국 레퍼토리이긴 하나, 커버곡 레퍼토리는 생각만큼 늘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레퍼토리로 만드려고 졸업 공연에서도 불렀는데, 결국 그때만 부르고 끝인 노래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노래들은 금방 질려하는 것 같다. 내가 제일 부르기 좋아하는 건, 디즈니 노래 아니면 본인 자작곡이다. 특정 관심사에만 극단적으로 몰입하고, 나머지는 해야 되는 걸 알면서도 못하는 이 귀여운 ADHD.


무대에서 가사를 안 틀리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외우려면, 어지간히 그냥 아는 정도로 안 된다. 자다 깨도 줄줄 나오게 외워야 된다. '애써 가사 다 외워놨는데, 왜 또 안 불러!!!'싶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어떤 곡은 한 번 레퍼토리로 만들면 10년 간다는 뜻이다. 하도 오래 불러서, 가사 틀릴 걱정 없는 곡들이 많다.


공연에서 부르는 한국 노래는 전부 자작곡이다. 가요 레퍼토리가 없다. 방송국 오디션 프로그램에 지원하려면 잘 부르는 가요가 있어야 한다. 자작곡은 허용이 안 되고, 남들이 아는 가요여야 한다. 그래서 '해야 하는데' 안 된다. 몇 번 공연에서 부르던 가요가 있었지만, 이제 다 질려서 새로 찾아야 한다. 새로 찾아봤자 금방 질릴 생각에 찾기 싫다. 이건, 어차피 누굴 좋아하든 연애하든 다 한두 달 밖에 안 좋아해서 다 징글징글해져 버린 나의 연애 상황과도 똑같다. (한 명에 꽂히면.. 이하 생략한다. 나도 이건 처음이라 무섭다. 10년 갈까 봐.)


어차피 나의 목표는 유명한 가수다. 가수가 자기 노래만 부르지, 커버곡 많이 부르는 걸 봤나. 그러려면 다 사용 허락받아야 된다. '쟤는 지 노래만 부른다'는 비아냥도 들어봤는데, 나는 공연팀 중 한 명에 만족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지금은 공연 나갔을 때 나를 아무도 모르니, 어쩔 수 없이 자작곡 사이사이에 유명한 곡들을 섞어야 할 뿐이다.


그래도 레퍼토리를 늘리려는 노력은 계속한다. 오늘은 샹송 '사랑의 찬가'를 레퍼토리화 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가사가 불어라 외우는데 시간이 좀 걸릴 테지만, 워낙 시대를 거스르는 명곡이라 오래오래 부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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