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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연 Jan 06. 2024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다

감사

12월 31일은 정확히 영국 살이를 시작한 지 100일이 되는 날이었다. 시간이 지나니 점점 해외 살이의 단점도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단점이 곧 약점을 개발하거나 강점을 강화시킨다는 걸 깨달았다. 한국에서처럼 조금만 목이 아파도 이비인후과에 갈 수는 없으니, 한국에서 자취할 때보다 더 방 청결과 환기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기침하는 사람이 있으면 근처도 가지 않으려 했고 옷도 남들보다 과하게 껴입고 다녔다. 엄마가 그렇게 챙겨 먹으라고 할 때는 귀찮아하더니, 스스로 돈을 주고 영양제를 매일 같이 챙겨 먹는다. 내가 영양제 한 통을 3개월 만에 다 먹다니 믿을 수가 없다. 또 겨울에 해가 일찍 지기 시작하자 그에 맞춰 자는 시각도 한 시간 앞당겼다. 12-1시에 자던 습관을 11-12시로 바꿨다. 덕분에 일찍 일어나 '아직도 아침 10시 밖에 안 됐어?'라는 생각이 들어 4시에 해가 져도 덜 아쉬웠다. 한국에서부터 규칙적이고 건강한 생활에 대한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더욱 강화되었다. 


열차 예상 도착 시간 5분 전에 기차 파업을 알게 되는 일도 있었다. '다음 열차는 오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그 열차 역시 5분 전에 취소, 그다음 열차도, 그다음 열차까지 1시간 동안 4번의 직전 취소 끝에 집에 돌아왔었다. 그런 잦은 기차 파업은 상황이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대처할 줄 아는 융통성을 길러줬다. '닫힘 버튼 없는 엘리베이터' 등으로 '나의 한국인 자아'를 누르며 인내심을 기른 결과랄까. 이제는 짜증을 확실히 덜 낸다. 계획대로 되지 않음에 도가 텄다. 여유가 생겼다. 


영국에서 가본 한국 식당 중에 마음에 드는 음식은 없었다. 한국 살 때 외식하거나 배달시키면서 뭔가 음식이 맛없다, 못 먹겠다는 생각을 못해봤는데 놀라웠다. 2만 원 넘게 주고 몇 숟갈만 뜨고 마니 너무 돈이 아까웠다. 이후 한국 음식은 그냥 없는 셈 치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요리에 재미가 들렸다. 시작은 순두부찌개였으며 이어 김치찌개를 대성공하면서 요리에 푹 빠졌다. 이제 '돼지고기김치계란치즈볶음밥' 같은 건 별로 생각도 안 하고 쉭쉭 만든다. 워낙 호기심과 학구열이 높아, 뭐든 배우는 걸 좋아하고 금방 한다. 



한국에 돌아가면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감사할 줄 알고, 나에게 맞는 것들을 선택해 살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4시에 해가 지지 않음에 감사할 거다. 집에서 조금만 걸으면 편의점과 병원이 있음에 감사할 거다. 맛있는 한 끼 음식 만 원 주고도 사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할 거다. 음식은 정말이지, 이런 맛있는 음식을 내가 먹게 되기까지 거친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까지 생각하게 될 것 같다. 


한편 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켓이 그리울 거다. 기차 타고 30분만 가면 바다를 볼 수 있는 것도 그리울 거다. 하지만 그만큼 한국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서 할 거다. 기차를 하도 자주 탔더니 이제 srt 타고 서울에서 부산 가는 것이 멀지 않게 느껴질 것 같다. 워낙 집에만 있었어서 전철 타고 30분만 가도 당일치기 여행 급으로 느끼곤 했다. 


가끔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다. 돌아갈 때 무렵을 생각만 해도 속이 멀미할 때 마냥 이상해진다. 서울의 번쩍이는 거리만 떠올려도 이내 '으윽' 생각하기도 싫다. 그러나 아파서 이비인후과에만 가도 감사하고, 깨끗하고 스크린 도어 있는 지하철에 감사하고, 밤 11시 이전에만 주문하면 몇 시간 뒤 새벽에도 배송해 주는 마켓 컬리에 감사하고, 배달 음식 하나에 감사하고, 할머니가 해준 음식에는 가슴이 벅차오르게 감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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