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7 소튼 가는 길

by 이가연

손승연이 부른 '사랑, 결코 시들지 않는...' 노래를 비행기에서부터 반복해서 듣고 있다. 뭐랄까, 이 노래처럼 내가 참 견고해졌다. 소개팅 다니던 작년 12월과는 다른 차원이다. 그 시기를 다 겪었어야 했다.

올해 5월과도 또 다르다. 왜냐하면 5월에도, '제발 제발' 이 앨범 듣고 와라 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거는 을을 자처하는 거다. 하늘이 그걸 원하지 않았다. 어제도 공연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며 '쌍노무새끼가 나 같은 사람이 어딨다고 이쒸'했다. (거 남의 집 귀한 아들에게 욕하면 안 되는데, 야가 먼저 남의 집 귀한 딸을 반 죽여놨어요.)

소튼으로 가는 기차 안이다. 잠을 3시간 밖에 못 자서 괜찮을지 모르겠다. 11시에 자서 2시에 깼는데, 이후로 한숨도 못 잤다. 공연 있다고 내가 특별히 영향받을 사람은 아닌데, 시차 적응이 안 되는 건가. 보통 한국에서 영국 갈 때는 시차 적응 문제는 없었다. 영국에서 한국 돌아갔을 때가 문제다.

영국인 친구가 연락이 종종 안 될 때가 있어서 힘들다. 방금도 ADHD들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을 견디기 어려워한다고 보냈다. 영국 오빠는 안정형, 얘는 회피형이다. 따지고 보면 영국 오빠가 답장이 더 느릴 때도 있고, 심지어 1주, 2주씩 걸리기도 했다. 그런데 왜 오빠는 단. 한. 변. 도 답장이 늦게 와서 짜증나본 적이 없고, 얘는 많을까.

답장 속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오빠는 안정을 느끼게 해 주는 거다. 절대 어디 안 가고, 연락이 없더라도 사정이 있을 거란 게 내 의식에 박혀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그만큼의 믿음은 없는 거다. 약속을 하고도 약속을 안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약속 직전에 답이 없으면 불안할 수밖에.

이게 다 걔도 완전 회피형이었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기억해야 할 건,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상대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니다. 답장이 이틀 뒤에 오든, 일주일 뒤에 오든, 오빠처럼 불안하지 않을 수 있다. 지금 베트남에 가있기에, 아무래도 불의의 사고 같은 것이 걱정은 되었어도, 짜증나진 않았다. 그런데 오빠를 제외한 모두가 나를 짜증이 쌓이고 쌓여 화나게 했다. 이제와 생각하니 오빠를 제외한 2030 모두가 회피형이었던 거 같다. 원래 불안형이 회피형을 끌어당긴다. 그래서 이젠 4050 지인만 남았다.

안타깝지만 이 또한 내가 배워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오빠도 전에 솔직히 말해서 내가 영국에 친구가 더 있었으면, 영국인 친구를 안 만났을 거라고 했다. 그런 마음을 그때그때 들여다보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어는 한국어보다 훨씬 낫다. 방금도 내가 견디기 어렵다고 말을 하지 않았는가. 한국인은 내가 그렇게 얘기했을 때, 미안하다고 하며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거의 못해봤다. 상대방이 그렇게 느꼈으면, 그게 본의 아니었든 일단 사과하는 정신이 외국인에겐 깃들여져 있다.

그건 걔도 그랬다. 난 아직도 "니 진짜 상처받았나"가 떠오른다. 내가 그때 뭐 때문에 상처받았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 말만 생각난다. 그러니 나는 계속 믿으며 '상황 탓이다. 타이밍 탓이다. 사람은 괜찮은 애였다. 나랑 똑같은 놈이다. 나도 불안, 회피 둘 다 공존한다.' 하게 되었다.

이제 30분 뒤면 도착이다. 오 주여. 어떻게 이런 마음을 저에게 심으셨나요. 얘 아니면 진짜 혼자 살길 바라시나요.


영혼이 옆에서 같이 걸어 다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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