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8 영국 파워

by 이가연

3시간 밖에 안 자고 40분 공연이라니. 평소 8시간을 잘 잤어도 40분 공연하면 집 와서 피곤해했다.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한참 지나도 생각보다 안 피곤했다. 몇 번 하품이 나오긴 했지만, 특별히 졸리다고도 생각 안 했다. 신기했다. 이것이 영국 파워인가.

돈 받는 것도 아닌데 기차 값을 왕복 6만 6천 원을 들여서 런던에서 소튼까지 공연하러 가다니. 한국이었으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이다. 그래도 좋았다. 오랜만에 소튼과 인사할 수 있어서, 5월과 완전 다른 기분을 느껴서, 어제 런던에 있을 때와 다르게 왠지 모를 평화로움을 느껴서.

공연은 1시부터 시작했고, 내가 두 번째 팀이어서 갔을 때 앞 팀이 공연 중이었다. 상당히 시끄러워서 근처에 가기도 싫었다. 장소 특성이 나랑 안 맞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미 준비한 거, 내가 할 수 있는 거 잘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내가 잔잔한 스타일이라고 해서 기죽으면 안 된다.

커버와 자작곡을 포함해 총 9곡을 불렀다. 공연이 끝나고는 스태프들에게 어떤 노래가 가장 기억에 남냐고 물어봤다. 한 명은 라푼젤, 한 명은 '그런 너라도'가 제일 좋았다고 했다. 특히 자작곡 좋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다. 가사도 못 알아듣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건, 그만큼 내가 표현을 잘하고 노래를 잘 부른 거다..

반면, 사실 오늘 공연은 전곡을 제대로 집중을 못했다. 'Enchanted' 한 곡만이 부를 때 몰입이 되어서 살짝 울컥하며 불렀다. 그건, 걔 때문이다. 그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쳤던 멘트가 좀.. 의미심장했다. 집에서 공연 준비하면서, 자작곡 가사 소개를 제외하고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거늘, 역시 마음대로 되는 거면 다짐할 필요가 없다. 아무렴 어떤가.

친구가 늦는다곤 했는데 그래도 한두 곡은 볼 줄 알았다. 기차는 또 한 번 딜레이가 되었고, 결국 다 끝나고 2시 15분에 만났다. 나는 마지막 곡 가사를 완전히 절었다.

이건 친구를 탓할 문제는 아니고, 내 ADHD와 영국 기차를 탓할 문제다. 친구가 끝내 한 곡도 못 듣는 건가 싶으니 집중을 못 한 거다. 물론 자작곡이니 한국어라서 아무도 내가 가사 틀린 줄 모른다. 아무렇게나 막 부르면 되는데 그게 좀 몇 마디 길게 즉흥을 했다.

한국인이면 눈치챌 정도였다. 그러니 다음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 전에도 서울에서 친구를 초대했는데, 늦게 와서 이럴 거면 아예 오지를 말지 싶었다. 그 정도로 나는 올 때까지 공연에 집중이 안 되고, 중간이 들어오니 집중도 깨지고 초초초 방해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내 공연에 초대할 때 늦을 거면 아예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게 나아 보인다. 물론 와줬는데 늦게라도 봐주는 게 당연히 좋지만, 힘들다. 이번이 그렇게 방해받은 두 번째인지라, 앞으론 진짜로 그리 말할 것이다. 언제 오나 신경 쓰는 게 고문이다. 한 가지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ADHD에게 그러면 안 된다.

12시에 도착했어야 하는 기차가 2시에 도착하는 영국 기차의 문제점은 말할 것도 없다. 친구도 어지간히 똥줄 탔을 것이다. 기차 안에서도 사람들이 엄청 항의했다고 한다.

3시간 잤는데 이럴 수가 없다. 2시간 반 걸려 가서 40분 공연 후, 친구와 펍에서 한참을 얘기하고, 기차 타고 전철 타고 다시 2시간 반 걸려서 방에 도착했다. 한국 같았으면 생각도 안 했을 스케줄이다. 수도권 밖으로 한 번도 당일치기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별로 안 피곤하다. '이게 도파민이고 쾌락이구나' 싶다.

심장이 뛰는 일을 하면 이게 맞다. 아무리 서울에서 "저는 지금 밖에 3,4시간만 나가도 너무 피곤한데요." 해도, 그건 다 한국인이 불편해서다. 얻는 게 없다고 느끼니 감수할 마음이 안 드는 거다. 반면 유명한 가수가 되어, 콘서트를 위해 합주하고 회의하고 준비하는 일은 밖에 12시간 있어도 안 힘들 거다.

오늘 공연의 의의
1. 영국에서 첫 '그런 너라도' 라이브 : 이 곡을 썼던 작년 8월엔 올해 이 노랠 발매하고 영국에서 부르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2. 영국에서 첫 '너도, 알겠지' 라이브 : 가사는 틀렸지만, 그만큼 집중이 깨졌을 때 틀리기 쉬운 노래였단 것도 깨달았다. 연습하자.
3. 영국에서 첫 공식 기록이 남는 공연 : 이건 한국에서 공연팀 지원할 때도 공연 경력 자료로 첨부할 수 있다.
4. 처음 대중들 앞에서 'Enchanted' 라이브 : 울컥하며 몰입하는 내 모습을 보며, 이 곡을 앞으로 충분히 잘 레퍼토리 삼을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5. 올해도 사우스햄튼 공연 : 오늘로써 3년 연속 사우스햄튼에서 공연 경험이 생겼다.

이렇게 정리하지 않아도, 어제도 오늘도 내겐 정말 의미 있는 공연이다. '피곤하지 않음'으로 몸이 말해주고 있다. 마음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몸이 느끼는 건 늘 정확하다. 난 가뜩이나 스트레스받으면 신체화 증상으로 확확 잘 나타난다. 부서질 것 같이 피곤해야 마땅한데 몸이 가볍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는 증거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영국 #7 소튼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