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20 5일 차 이야기

by 이가연

가끔 여기 있는 게 꿈처럼 느껴진다. 방금 버스에 앉아있다가 그랬다. 꿈 같다.

최면 때문인가. 최면에서 걔랑 버스도 타서 그런가. 그 영향도 없진 않을 것 같다. 머릿 속으로 너무 생생히 그려봐서 그게 눈 앞에 있는 게 신기할 수 있다. 그런데 5일 차까지 계속 그럴 줄은 몰랐다. 지난 번에도 이랬나. 아닌 거 같다. 이번이 좀 이상한 거 같다.

그런 반면, 언제부터 영국 징글징글하다하고 익숙한 단점들이 눈에 다시 들어오나 봤더니 그것도 5일 차다.

두 나라 다 애증 관계인데 한국은 남들보다 좀 혐오스러운 사람 유형이 특별히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처음 만나는 사람을 보자마자 나이, 사는 곳, 하는 일 따위를 안 물어보면 대화를 할 줄 모르는 게 보통인 거, 흔히 한국은 정이 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외국이 정인 거고 한국은 원하지 않은 오지랖인 것이 있다. 배운 사람들 다 그거 문제인 거 알면서도 그냥 사는 거 안다. 나는 매우 힘들다.

똑같은 것을 남들의 백 배로 느끼니 당연하다. 좋은 것도 백 배, 나쁜 것도 백 배다. 그러니 애증이 생긴다. 너무 사랑하고 너무 싫어하는 거다. 너무 너무. (쓰는 순간 무릎에 두 번이나 멍이 들어있는 걸 이제 발견했다. 자꾸 어디 부딪히고 언제 부딪힌 지 모르는 것도 ADHD다...)

방법은 하나다. 좋은 일이 자주 일어나야 한다. 한국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한달에 페이 공연이 두세 번 있으면 당장 규칙적인 직장 없어도 당분간 만족하고 살 거다. 이게 내가 먹고살 일이고, 당장 이걸로 용돈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페이 공연은 일 년에 몇 번이고, 2017년부터 아무리 노력해도 아직도 안 되는 게 문제다. 그런 큰 좋은 일 말고, 남의 선택을 받아야하는 일 말고, 내 의지로 만들 수 있는 좋은 일을 많이 찾을 거다.

벌써 내년 2월에 또 온다며, 무조건 또 온다며 생각하고 있다. 지금 굳이 한국 생각을 하고, 돌아가면 또 우째 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 실천하면 더 좋은 게 있다.

오늘 좋았던 일을 기록하는 것이다. 원래는 집에만 있어도 충분히 바쁘게 사는데, 한 거 없다고 느낄 나를 위해, 오늘 한 일을 쭉 적는 활동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필요한 건 '예쁜 감정 수집하기' 같다. 좋은 일을 더 기록하기 위해서라도 찾아서 하게 거다. 인생을 태교하듯이 살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 하루에 물 마시듯, 나에게 좋은 것을 찾아서 영양분으로 넣어줘야 한다.

오늘은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더들 도어에 가서 좋았다. 오후부터 날씨 흐릴 거 같아서 아침 일찍 다녀왔는데 역시 오후에 바닷가 보니 흐려서 일찍 다녀온 게 뿌듯했다. 아침 먹으면서, 기념품 가게에서, 아이스크림 사면서 점원들로부터 따뜻함을 느꼈다. 엄마랑 영통하려는데 카톡 페이스톡이 갑자기 안 되어서 구글 미트 링크를 보냈는데, 엄마가 구글 미트를 이미 할 줄 알아서 좋았다. 기념품 가게에서 예쁜 거 사서 좋았다.

한국에 더들 도어처럼 웅장하고 멋있는 자연 경관은 제주도에나 가야있는 거 아닌가 싶다. 그런데 나머지는 사실상 한국에서도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일이다. 거 없다.

작년 8월, 12월, 5월에 왔을 때와 너무 다른 점이 있다. 그때는 한국에서 잘 못 지내고 있었다. 그러니 영국이 여행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한국에서도 이미 8월 말부터 잘 지내고 있었는데, 6월에 잘 못 지내던 시기에 예악해서 보너스로 오게 됐다.

이제 딱 일주일 남았다. 자꾸 막 어제도 엊그제도 손가락으로 세어보게 된다. 혼자 공연 다니던 어려움, 여기서는 그냥 여자도 아니고 동양인 여자란 것을 좀 깨달았다. 쉬운 일 아니다. 첫째 날이고, 둘째 날이고 그렇게 주변에 아무도 없이 혼자 너무 잘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사실 내가 이뻐죽겠다. 심지어 둘째 날은 3시간 자고도 무사했다. 첫째날 '아직, 너를' 무대가 이번 여정의 최고 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다른 순간이 그걸 뛰어넘길 바란다. 여전히 계속 여행이라고 부르고 싶지가 않다. 그러기엔 상당히 비즈니스 트립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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