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다닐 때도 PhD 세미나를 한 번 들었다. 그러고선 '아하. 박사는 진짜로 연구하고 싶은 주제가 확실히 있어야겠구나. 그게 아니라 막연히 나 박사할래 싶은 마음으로 학교를 찾으면 안되겠구나.' 깨달았다.
그건 ADHD 진단 전이다. 이젠 내 음악적 역량과 ADHD 배경을 활용하여, 세상이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언젠가는 꼭 '한국 ADHD 예술인 협회'를 만들 거라는 구체적인 목표가 생겼다. 원래는 그냥 '세상에 도움이 되는 재단' 하나 만들고 싶다는 모호한 생각만 있었다.
나도 작년까진 내가 장애가 있는 줄 몰랐다. 진단이 내 삶을 바꿔놨다. 세상에 기여하려는 정도가 달라졌다. 원래는 그냥 내 음악으로 사람들을 힐링하게 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했다. 이젠 그걸로 만족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나 같은 신경 다양인을 돕고 싶다.
석사는 MMus Music Performance로, 논문도 없이 그냥 졸업 공연에 끝났다. 노래만 잘하면 됐다. 솔직히 석사 따기 너무 너무 쉬웠다. 그렇게 쉬워도 되나 싶다. 6개월 수업 듣고, 30분 공연 한 번, 50분 공연 한 번 하면 끝날 일이었는데, 나에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웠다.
뭔가 성취한 느낌이 사실상 적게 든다. 영국에서 열심히 살았던 건 맞는데, 학교에서 뭔가 엄청 해야한 게 아니라, 내가 다 일을 만들어서 했다. 누군가는 한국에서 유학생들 도와주는 일 하면 안되냐고 했는데, 평범한 유학 생활을 한 게 아니라서 내가 아는 게 뭐가 있나 싶다.
학교 생활은 정말 식은 죽 먹기였고, 기숙사 소음과 한국 놈들이 힘들었다... 그러니 돈만 있으면 제발 석사 한 번 더 하고 싶단 소리, 풀펀딩 박사가 가능하다면 하고싶단 소리가 작년부터 계속 나왔다.
교수는 내가 작년에 너무 급히 한국에 가버려서, 향수병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한국은 이 가격이면 고급 음식을 먹는데 영국 음식이 비싸기만 하고 거지 같다는 생각은 자주 했어도, 한국 거리와 간판들을 떠올리면 '으윽' 했다. 어느 유학생이 한국 거리를 떠올리면 '으윽' 할 정도로 싫을까. 향수병의 ㅎ도 없었고, 급히 돌아간 건 ADHD '충동성' 증상이었다. 한 명만 나를 막았어도 안 갔는데, 아무도 날 안 막았다. 그게 ADHD 충동성이란 걸 나도 모르고, 남들도 몰랐기 때문이다. 다들 내가 진짜 힘든 줄 안 거다.
그런 와중 어제 교수가 보내준 링크 중에 끌리는 것이 있었다. 자폐 아동들에게 음악 치료를 하는 거다. 석사를 한 번 더 한다면, 음악 치료 전공을 하고 싶다. 원래도 한국에서 음악 치료 전공을 고려하다가, 아무래도 유명한 가수 되는 게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 석사도 똑같이 퍼포먼스 전공을 했다.
유명한 가수가 되기 위해서 지금도 충분히 노력을 다 하고 있다. 더 뭘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인다. 박사 하면서도 똑같이 다 할 수 있다. (일단 내가 남들 다섯 시간 걸릴 일을 30분 만에 한다. 물론 그게 챗GPT 이전 얘기라, 지금은 다들 빨리할지 모르겠다..)
오늘 아침부터 이미 원서 작성을 시작했다. 경험상 노트북으로 이런 거 작성하면 눈알이 아프다. 핸드폰은 괜찮은데 희한하다.
작년 7월부터 1년 동안 정말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는데, 8월부터 끝이 보이더니 9월엔 어떻게 살아야할지 가닥이 더 잡혔다. 생일 이후로 운기가 바뀐 느낌이 들더니, 이제는 2단계로 올라온 느낌이다. 박사를 하게 될지, 직장을 구하게 될지, 아니면 정말 원하는대로 가수로서 기회가 올지, 뭐가 먼저 찾아올진 알 수 없다. 뭔가 먼저 오든 반갑게 맞아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