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박사를 지원해서 붙어도, 국제 학생 학비 1년 3천2백만 원에서 영국 학생 학비 9백만 원으로 줄여주는 거다. 그래서 추가로 장학금을 지원해서 또 합격해야 갈 수 있다.
이공계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음악 박사는, 그것도 풀펀딩은 공고 자체가 잘 안 뜬다.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공고가 뜰지 모르겠다.
교수가 나는 장애인으로 체크했기 때문에, 최소 기준만 충족하면 무조건 면접 기회를 줘야 한다고 그게 법이라 했다. 사실 그거 지원서 쓰면서도 봤다. 근데도 다 떨어졌길래, 그러려니 했다. 간절하게 넣은 데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 설렁설렁 될대로 되라였다. 교수가 그게 다 내가 비자를 얻은 상태가 아니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커리어 컨설턴트에게 한 번 물어보라고 했다. 오퍼 받으면 워홀 비자를 바로 받을 수 있다고 명시해 뒀지만, 직장 입장에서도 얘가 비자를 못 받을 수도 있는데 뽑을 수 없는 건 맞다.
네가 영국에서 일할 것이 확실하면 비자 신청을 왜 지금 못하냐?라고 뼈를 때리셨다. 그게 제가 박사도 보고, 직장도 보고, 한국에서도 아주 좋은 기회가 혹시라도 들어오면 잡고 싶고, 아주 다 열어놨기 때문이죠. 어느 쪽도 닫을 생각이 없어 보여요.
가장 큰 차이점은 박사는 최소 3년이고, 취직은 9개월 계약이다. 취직이 훨씬 더 안전한 선택이다. 일주일에 오랜 시간 일을 해본 건 아니지만, 해보긴 해봤다. 그러나 나는 살면서 논문을 써본 적이 없고, 신경 다양인, 음악 치료, 정신 건강 키워드는 분명 매력적이지만 나의 관심이 풀타임으로 3년 동안 지속될 거란 보장이 없다. 아니, 그냥 지금 봐도 그래 보인다. 3년 동안 내 관심이 지속되려면, 내 보컬 스킬 향상에 도움이 되는 주제여야 된다. 예를 들어, 'ADHD인이 어떻게 하면 무대 위에서 집중할 수 있을까.' 그나마 타협해서 이런 주제만 가능한 거 내가 다 아는데, 교수가 뮤직 퍼포먼스 전공은 절대 돈 안 나온다고 이거 딱이라고 해서 끼워맞춘 거다. 전부터 느꼈던 사실이지만, 팔랑귀라 남이 그렇다하면 그런 줄 안다. 실은 전에도 그 박사 지원 링크 봤는데, '내가 ADHD지, 자폐냐. 자폐에 대해 내가 뭘 알아.'하며 안 된다고 넘겼다. 근데 교수가 한마디 하니까 넘어간 거다.
석사는 때려치울 확률이 아예 없었다. 가기 전이나, 힘들었을 때나 생각도 안 들었다. 중간에 한국 돌아가도 아파서 갔다고 하면 온라인으로 리사이틀 제출할 수 있을 거 알아서 간 거다. 확인하지 않아도, 그냥 여기 정신 건강 서포트 시스템을 믿었다.
중도 포기에 대한 위험이 내겐 아주 중요하다. 워낙 충동성이 짙기 때문이다. 저 3시간 효과 가는 ADHD 약으로 그게 막아질 거라고 기대하기가 '지금으로선' 어렵다.
석사는 전 과목 마음에 드는 학교가 여기가 유일했기 때문에, 하기 싫은 게 그다지 없었다. 학교에서 하는 일 중에 힘들었던 게 하나도 없어서, 안 해본 분야 3년은 보장이 안 된다. 음악 치료 분야로는 석사가 하고 싶지, 박사 레벨은 아닌 거 같다. 나는 관심을 꾸준히 주지 못하며, 마음이 확 식으면 하루도 억지로 못 한다. 사람도 걔 빼고 모두가 그랬듯, 노래, 무대만이 꾸준한 나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 아무리 봐도 그것만 가능하다.
"ADHD는 기본적으로 아이가 그대로 어른이 된 거다. 그래서 호기심이 넘친다."라고 교수에게 말했더니 "그거 너무 아름다운데"라고 하셨다. 이번에 학사 과정에 'music and disability(음악과 장애)' 과목이 생겨서, 그렇다면 뉴로티피컬의 특징은 뭔지 알아봤는데, 신경 다양인과 다르게 뉴로티피컬은 너무 억압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뉴로티피컬들 사이에서 내가 가장 잘 받아들여지고, 편안한 환경으로 갈 수 있을까.' 를 신경 써왔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갑자기 확 때려치우지 않고 내 열정이 유지될 수 있을까.'가 제일 중요하다. 가수로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포기할 자신이 있고, 그 외의 일은 여차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쉽게 포기할 자신이 있다. 안 간절하다. 그걸 교수와 같은 뉴로티피컬들은 절대 모른다. 그들은 '세상에 어떻게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저 매일 밥 먹는 것도 진짜 하기 싫어요. 샤워는 엊그제 했는데 왜 오늘 또 해야하는지 모르겠고 힘들어요. 일상 난이도 자체가 다르다.
안타깝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란 게 확실하게 보인다. 참 어려운 상태지만, 방법을 찾아볼 거다. 저 박사는 언뜻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만 나에게 딱 맞아보인다. 심지어 직전 글에서 아이들을 좋아하고, 음악 치료를 전부터 해보고 싶었고, 신경 다양인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고 하니, 나도 나한테 속았다. 외국어, 봉사 활동, 아이들 가르치기 다 사랑하는 일인 건 맞지만, 그걸 꾸준히 매일 3년 하라고 했으면 절대 못 했다. 일주일에 한 번하니 가능하고, 그마저도 했다가 안 했다가 반복하며 여기까지 온 일이다.
'내가 나한테 속았다.. 분하다...'싶지만 빨리 알았으니 다행이다. 이런 적이 많다. 이미 중 3때 '현실적으로 어려우니까' 연기과 쓰고 당시 고등학생 인생에서 제일 두고두고 후회하고, 고등학교 가서도 '현실적으로 어려우니까' 클래식 작곡 전공 같은 말도 안 되는 거 몇 달 하고, 심지어 대학원 지원할 때도 '현실적으로 교육 전공하는 게 더 낫다'며 음악 교육 전공 지원해서 붙었다가 바꿨다. 그러곤 이제는 '현실적으로 어려우니까' 음악 치료 박사를 하겠다고 하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남이 한마디 한 거 가지고 휙 흔들려서 그랬다. 하지만 갈대처럼 한 번 휙 흔들릴 순 있어도, 다시 제자리 찾을 수 있다. '아직도 이러냐'싶지만, 과거보다 나에 대해 너무 잘 알아서 금방 자리를 되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