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을 옮겨다녀야했단 걸 깨달았다. 한 호텔에 오래 있으니 도파민 결핍이 일어났다. 이렇게 5박 6일 한 호텔에 있어본 적이 없다. 작년 12월에도 진짜 피곤해했는데, 로마고 베네치아고 다 처음 가본 도시에 영국 1주일이었다. 물리적으로 얼마 걸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어차피 하루에 만 보씩 일주일 걷는 것도 극기훈련이다. 도파민이 팍팍 나와서 그 아픔이 덜 느껴지도록 하는 것에 다음부터는 집중해야겠다. 그러려면 물리적으로 호텔을 옮겨야한다. 너무 자주 옮기면 불편하겠지만, 호텔 체크아웃하고 체크인하는데 도파민이 나온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이렇게 또 어디에서도 팁을 얻을 수 없는, 나에 대해 알아간다.
여행 가면 짜증 많이 나니까 그래도 ADHD약 챙겨야 한다고 챙긴 건데, 생각보다 더 하다. 역시 9일차, 지대로 영국 욕을 하기 시작했다. 작년에 급히 한국 온 건 말이다. 이미 물이 90도까지 끓고 있었는데, 그 10도가 몸살로 아팠던 거다. 자꾸 자책하고 자꾸 후회하고, 이 말도 어차피 또 까먹겠지만, 나는 한국이 가고 싶던 게 아니라 영국이 아주 싫어서 갔다. 교수가 오해한 것처럼 한국 향수병은 아니었지만, 영국 짜증나서 간 거다.
친구도 안 만나고 싶고, 친구가 더 있었으면 안 만났을 거라는 영국 오빠 말도 떠오른다. 지금 한 달 째 오빠가 거의 부재하다. 1-2주에 한 번 생존신고한 수준이다. 친구라고 둘 있으면서 한 명은 계속 싫은 기분이 안 가시고, 한 명은 잠시지만 사라졌으니, 글만 쓰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글만 쓰면, 뇌가 터질 거 같다. 오빠한테 카톡할 말을, 다 글로 쓰니까 그렇다. 어디엔가라도 타이핑을 하며 실시간으로 남기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오전에 드로잉하면서는 메모장을 못 쓰니 머릿 속은 계속 글 쓰고 있었다. 중간중간 메모장 켜서 메모하기도 했다. 글은 하루에 3개만 써야, 뇌가 그러고 있는 걸 덜 한다. 발만 아픈 게 아니라, 뇌도 아프다. 이 놈의 ADHD, 기절하겠다.
드로잉 두번째는 잘 끝났다. 모델은 단상 위에 올라가서 포즈를 취한다. 단상 위 의자에 앉거나, 쿠션 위에 눕기도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다 옷을 입고 있는데, 모델은 상당한 자유로움을 느끼겠다고 생각했다. 쉬는 시간에 모델과 진행자에게 다가가, 내가 사는 데는 라이프 드로잉이 흔하지 않다며 몇가지 물어봐도 되겠냐 했다.
그랬더니 진행자 자신도 모델이라며, 사실 이 나라도 누드 모델한다고 하면 놀라고 무슨 스트리퍼인 줄 아는 사람도 있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세션이 특히 편안한 분위기라며, 미대는 학생들이 막 더 어려운 포즈를 요청해서 어렵다고 했다. 진행자는 원래 드로잉 세션을 계속 듣다가 자기도 모델이 되었다고 했는데, 역시 그래서 모델에게 적극적으로 포즈 조언을 주었다.
지난 번 모델과 다르게, 이번 모델은 진짜 실례지만 살집이 엄청 있으셨다. 그런데 그래서 더 인체의 아름다움을 느꼈던 거 같다. 왜냐하면 나조차도, 저 분이 아름다우시니까 내가 이게 아름답다고 생각한 건가 의문을 품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몸이 어떻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결국 친구에겐 완전 폭발하고 답장 감당할 자신 없어서 차단했다. 영어로 저렇게 폭발이 가능했구나. 한국말은 모국어고, 영어는 어느 정도 필터 생기는 게 아니었다. 하기사 영어라고 컨트롤이 되면 내가 ADHD가 아니다. 아는 욕이 없어서 욕만 못할 뿐이다.
친구는 ADHD도 아니고 그런 기질도 없는데, 당연하다. 오빠는 비단 ADHD인을 많이 만나본 것 뿐만 아니라, 본인도 기질이 좀 있어보인다. 이로써 데이터가 확실해졌다. ADHD 진단을 받았든 안 받았든 그 성질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기껏 친구 집 근처 호텔로 이동 중인데, 친구를 확 끊어내버렸으니 어지간히 기분이 안 좋다. 그냥 이럴 거면 소튼에만 있지 왜 이리 고생하나 싶다. 지금이라도 워딩 호텔 그냥 버려버리고, 소튼에 호텔 새로 잡을까 싶다. 돈 걱정만 없으면 당연히 그리 했다.
친구랑 펍에서 수다하고 싶어서 영국 왔다고 했으면서, 겨우 한 번 펍 가고 그 친구에겐 아주 제대로 폭발했다. 영국 오빠도 아니고 내가 뱉은 말을 저 친구가 이해할리 없을 거 같다. 한심하다고 so absurd so absurd 라고 했다. 엄청나게 장문을 치는데 1분도 안 걸렸다. 설사처럼 싸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예전 상담사와도.. 내가 누군가에게 한심 마일리지가 차면 안 된다고 했다. 진짜 그거 마일리지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계속 누적되어 폭발한다는 걸 몇 년 전부터 너무 알았는데, 영국 오빠 말대로 영국에 친구가 얘 하나여서 그랬던 거 같다. 한심하면 안 된다... 친구는 존경스러워야 한다. 그래야 안 폭발한다. 진짜 새기고 새겨도 힘들다. 분명 이 순간만이다. 아마 아주 금방 친구가 그리울 거다. 그걸 알아도 절대 컨트롤 못 한다. 이럴 때마다 너무 힘든 이유는, 절대 못 막는데, 이게 비 ADHD인은 인성에 문제 있는 사람이나 그러는 것이기 때문이다. 못 막는 걸 너무 알아서 힘들다. 남들처럼 반성하고 다음에 안 그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상대방에게 전혀 미안하지가 않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 ADHD 약도 먹었는데, 약 효과가 3시간으로 끝났던 건지 안 든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더 좌절감이 든다. 무엇보다 이러고 나면 내 몸에 무리가 간다. 방법은 정말 딱 하나 있다. 내가 그 상태일 때, 옆에 사람이 있어서 핸드폰 집어던지고 본인에게 다 얘기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게 가능한 적이 없다.
워딩까지 가려면 한 번 갈아타야 했다. 그것도 소튼에서. 위 글을 다 쓰니 소튼에 도착했다. 원래는 바로 기차를 갈아타야하는데, 거기 직원에게 이 티켓 가지고도 다른 기차 타냐고 묻고 나갔다. 그걸 내 본능이 시켰다.
모든 일엔 이유가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금 웨스트키다. 아, 걔가 위로해주는 거 같다. 뭐 같네.. Southampton. 저 글자가 야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