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엄마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 엄마가 다른 약도 챙기라고 했는데, 2주 동안 분노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럴리가. 원래 비상 약이라는 것은, 비상 시가 언제 올지 모르니 챙기는 것이다. 여행자 보험 들어서 보상 받을 확률보다 비상 약을 먹을 일이 발생할 확률이 백배 높다... 보험을 꼬박꼬박 드는 만큼, 앞으론 잘 챙겨 다니겠다.
영국을 너무 믿었다. 왜냐하면, 영국에서도 그 비상 약이 필요했던 건 한국 놈들 때문이었다. 그러니 영국 가서 영어만 하다 올 건데,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친구 이미 몇 번 화내본 전력이 있다. 그때마다 그럴만 했기 때문에, 친구가 엄청 사과를 하고, 나도 한국인은 절대로 저렇게 사과하지 않으니 풀려서 유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은 다르다. 나의 분노 수위가 달랐고, 몇 달 전 이미 친구는 기억도 안 날 일까지 전부 끌어다가 다 터트렸기 때문에 컸다.
이래서 예전 상담사가, '다음에도 또 그러면 어떨 거 같냐.' 트레이닝을 시켜줬는데, 역시 알아도 적용 안 된다. 다음에 또 그러면 진짜 폭발할 거 안다고 치자. 그러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하나. 그걸 아니까 그 사람을 멀리해야하는데, 멀리하는 게 잘 안 될 거다. 다음에 또 그러면 내가 진짜 폭발해서 말로 널 죽여놓을 수 있다고 엄포를 놓는다 치자. 애초에 괜찮은 사람이면 그런 말까지 필요가 없다. 애초에 그 말이 안 나오도록, 그냥 잘못을 안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내가 누군가 약속에 5분 늦는다고 화나지 않듯, 애초에 그런 5분처럼 마음에 쌓이는 잘못을 안 해야 된다. 영국 오빠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게 쌓일 만한 잘못, 한 번만 더 그러면 화낼 잘못을 한 적이 없다. 그냥 저 오빠만 기준 삼고, 저런 사람만 친구 하기엔, 평생 살며 처음 봤다... 나머지는 다 내가 폭발해서 미쳐버릴 노릇이다.
내가 걔 버린다고 했잖아. 친구는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면 화날 일 아니었다. 이 생각 지난 번에 얘 때문에 배 놓쳐서 폭발할 때도 들었는데, 하여간 거지 같다. 배를 놓쳤어도 1시간 뒤에 타면 되는데, 돈 날린 것도 아닌데, 머리 끝까지 화나서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도 너무 쳐다보기 싫었다. 그때도 '걔였으면 걔였으면 걔였으면 웃고 넘겼다'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이래서 사랑은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해도 다 귀여워보이는 거라 하던가. 사람들이 싹 다 한심할수록 생각나 죽겠다. 지금 날 유일하게 웃게 하는 건, 친구였을 때 걔가 했던 말이다. 내가 툭하면 막 누구도 귀엽고 뭐도 귀엽고 했나보다. 너는 귀여움의 기준이 너무 낮다며 "그럼 나도 귀엽냐" 했던 게 떠오를 때마다 웃음이 난다. 그땐 완전히 친구였어서 나도 "풉" 했다.
열 받아서 바로 워딩으로 안 가고 중간에 소튼 시내로 나오게 하다니. 우째 이리 하늘이 도움이 안 되는가. 한두 시간 뒤에 소개팅 가는데, 영국 오빠랑 소개팅에 어떤 사람 나올까 신나게 얘기하는데 갑자기 카페에 걔 프로필 뮤직 나와서 울었던 거 생각 난다. 가만 보면 우주가 진짜 안 도와준다. 그 소개팅에서 만난 사람이 유일하게 대화가 통한 사람이었다.
날씨도 이번에 참 운이 나쁘다. 9월이 이 정돈 아니다. 너무 바람 불고 항상 흐리다. 다음주는 내내 쨍쨍하다고 뜨는데, 이번주 내내 이랬다.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
비바람이 불어서 소튼에서 딱히 할 게 없었다. 제일 먼저 밀크티 집으로 갔고, 그다음은 웨스트키 서점만 갔다. 제 2의 고향에서, 고향에 대한 책을 샀다. 그게 의미있을 거 같았다.
어제 밤에는 분명, '아오!! 힘들어 디지겠는데 무슨 드로잉을 또 예약했지. 가기 싫다.' 싶었는데, 오늘 5시가 되도록 가장 좋았던 게 그 드로잉이다.
제발 화날 일 좀 안 생겨서, 유일하게 안 분노했고, 뭐 이런 애늙은이 같은 놈이 다 있나, 나이에 비해 너무 똑똑하다고 생각한 걔 생각 좀 안 났으면 좋겠다. 1년 반을 살아도, 얘 말고는 또래 여자고 남자고 한국인이고 영국인이고 싹 다 한심하고 싫으면 어떻게 삽니까.. 진짜 부모님이 어떤 분들이실래 애가 나보다 한 살밖에 안 많았는데 그렇게 똑똑했는지 궁금하다. 내가 이렇게 생각할 정도면, 진짜 진짜 대단한 놈인 거다. 그걸 알아봐주는 사람하고 잘 살고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