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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32 좋은 경험

by 이가연

바로 사과하는 것 말고도, 2년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을 더 알았다. 내가 확 화내고도, 아무렇지 않은 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엄마 왈, 굉장히 당황스럽다고 했다. 보통 사람이면 한 번 화냈으면 하루종일 가나. 나는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다르듯 다르다. 진짜 성인 ADHD는 애랑 똑같다. 어디 많이 아픈 거 아닌 이상, 울음 그친지 30초 만에 멀쩡하고 어른들도 별대수롭게 생각 안 하는 거랑 똑같이 대해주면 된다. 애를 키워보진 않았다만, 어릴 때 사촌동생에 "누나가 치사하대 흐앙"하고 울었던 기억이 문득 난다. "그런 뜻이 아닌데..."하고 달래줬을 거다. 마찬가지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내가 상처 받고 오해하는 게 아주 많다.

화낸지 한 3시간 만에 만났다. 이 친구에게 이 정도로 정신 나갈 정도로 와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보낸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안 만나고 한국 돌아가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내 기분 때문이 아니라, 이 친구가 기분 나빠서 싫을 거라 생각했던 거 아닌가. (그건 한국인 데이터지. 영국인은 안 그러잖아. 그 데이터 이제 버리자.)

그런데 친구가 if you still want me... (너가 아직 원한다면...)라고 하며 내가 어딨는지 물었다. 조인해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나서 하나도 안 어색하고, 누구도 그 얘길 꺼내지 않았다. 그냥 박사 과정 지원하는데 걸리는 부분 얘기했다. 브라이튼 박사도 있다고 했더니 그럼 일주일에 한 번 볼 수 있다고, 퇴근하고 만나고 하면 얼마나 좋겠냐며 좋아해줬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한국인은 전부, 전부, 전부 공격으로 받던데. 어떻게 영국 오빠고 친구고 이 영국인들은 내가 자기들을 공격한 게 아니라, 그만큼 서운하고 속상했단 표현임을 이리 잘 받아들이지. 왜 한국인은 그 수많은 사람을 만나봤어도 아무도 안 되고, 영국인은 몇 명 만나보지도 않았는데 되지. 한국인이 예로부터 한도 많고 화도 많아서 그런가... OECD 자살 1위 국가인 만큼 다들 여유가 없어서 그런가...

찡한 기분이 드는 순간이었다. '왜 이게 한국인들은 아무도 안 되지?' 때문이다. 너무 회복 불가한 실패 데이터가 쌓였다.

나는 나를 받아들여줄 수 있는 한국인만 대화하며 한국에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게 너무 꿈만 같으니까 영국을 찾아야한다는 게 슬프다.

내일은 간만에(?) 공연 간다. 아침엔 한 9시부터 12시까지 세븐시스터즈 다녀오고, 밥 먹고 호텔 들어올 거다. 오후 내내 바다 전망 구경하며 호텔에서 쉬고, 저녁 7시에 공연하러 갈 예정이다. 어제 종아리에 파스 붙이고 잔 덕을 무지 보고 있어서, 내일도 발 안 아플 거 같다. 다행이다. 여러모로 감사한 날이다.

정말 통제 불가하게 누군가에게 메시지로 화를 내고도 바로 당일 만나서 재미나게 대화를 나누는 경험은... 그동안 이 친구만 해봤다. 평생 얘만이다. 소튼 살 때도 바로 당일 만날 수 있게 가까웠기 때문이다. 애초에 얘도 남자친구 말고 친구가 나밖에 없어서 약속 있는 날이 없어 거의 언제든 내가 원하면 만날 수 있었다.

영국인이라도 사람에 대한 좋은 데이터가 쌓이니 감사하다. 사람 자체를 극혐하는 거보다 한국인만 극혐하는 게 나으니까.... 참으로 마음 아픈 말이다. 나는 한국 살고 싶다. 어쩔 수 없이 찾는 영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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