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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35 후회

by 이가연

'소튼에서 월 5백 주면 고려한다.'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고 다녔는데, 지원하려는 공고에 진짜 월 5백이라 쓰여있다. 그것도 최소다.

아유, 뽑아만 주십시오. 소튼을 아무리 욕했어도 돈 있어서 매주 토요일마다 런던 갈 수 있으면 괜찮다. 게다가 집값도 런던보다 줄일 수 있다. 여기 살려면 집값이 제일 많이 든다.

친구랑 술 마시다가 피식 웃었다. 문득 '아 쌍노무시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걸 뭐라 영어로 말하나 싶었다. '저 바다의 아들 (that son of a..)'라고 뱉는 생각 하니 웃겼다. 영어로는 욕을 하질 못해서 상상만 한다. 가르쳐준 사람이 없다. 이래서 주변 사람 영향이 중요하다. 친구랑 2년 지내면서 'fxxk'도 하는 걸 못 봤다.

오늘 오픈 마이크를 하고 싶었지만 원래 하려던 곳도 안 한다 했고, 다른 펍들에 더 물어봐도 다 안 된다 했다. 결국 그렇게 물어보고 다니느라 나는 준비된 기력을 다 소진했고, 호텔 지하 식당에서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지하 식당에 사람도 우리밖에 없었다. 당연하다. 누가 봐도 그냥 식당이나 펍을 가지, 거기서 저녁을 보내고 싶어 할 사람이 없었다. 그냥 아무 펍이나 자리 잡지, 너무 아깝다. 펍 가고 싶어서 영국 온 건데, 오늘 밤을 그냥 날려버렸다. 어제는 내 기분이 여전히 좀 껄끄러웠고, 그전 런던에선 공연이 껄끄러웠다. 친구랑 펍 가는 게 영국에 오고 싶었던 이유였는데, 제대로 이뤘단 기분이 안 든다.


그거, 그냥 내 의식 수준에서 납득할 수 있던 꿈 아닌가. 진짜 하고 싶었던 건 그냥 소튼 걷기 아닌가. 내가 마음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고 받아 들여야 행복해진다. 그냥 영국 왔으면 소튼 가서 과거 추억 회상하며 소튼 걷는 걸 제일 행복해할 사람인 거 아는데, 제발 이젠 좀 그만 그러라며 자존심이 막아서 본머스 호텔을 잡았다. 절대 소튼 숙박을 안 하겠다고 했다.

이번에 그 최면에서 나왔던 장면인 그 펍을 결국 안 가봤다. 내일이라도 가야 하나. 내일이 이번 마지막 기회다. 내일모레면 공항으로 가야 한다.

지금으로선 도무지 기차 타고 어디 나갈 기운이 들지 않는다. 일주일만 올 걸 매우 후회 중이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말 런던 며칠, 소튼 며칠만 숙박하고 갈 걸 그랬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되었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호텔 방 안에서 바닷가만 봐도 좋고, 바로 앞에 나와서 벤치에 앉아 있어도 좋다. 분명 한국에서 그리 생각했다. 영국 가면 그냥 길거리만 봐도 좋으니,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그게 참 막상 오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냥 친구랑 소튼 펍 갔으면 좋았을 텐데. 진짜 그냥 계속 소튼 호텔 잡을 걸. 너무 후회된다. 다른 도시 구경하면 좋을 줄 알았다. '소개팅하면 좋을 줄 알았다'와 같은 소리 하는 거 같다. 정말 똑같은 말이다.


아무도 남지 않은 도시에, 혼자 처량하게 또 걷기 너무 싫어서 그랬는데, 지금 이러는 게 더 처량하다. 이번에 세 번 갔는데, 하나도 안 슬프고 좋았다. 같은 영국 땅에 있으면서도, 애먼 도시에 숙박하면서 후회하는 게 더 불쌍해 보인다. 박사를 하든 취직을 하든 이 상사병부터 해결을 해야하는데, 이건 도무지 답이 없다. 걔 말고는 모든 또래를 다 싫어해서 방법이 없다. 하늘이 왜 이렇게까지 나를 고립시키는지, 훈련시키는지 모르겠다. 이미 많이 깨달은 것 같은데 더더 들여다보게 하고, 쉴 틈을 안 준다. 그래, 이제 항복할게요. 내가 영국에 가고 싶어한 건 소튼을 가고 싶다는 말과 같은 말이니 나는 소튼 숙박을 잡았어야 했어요. 내가 걔 버린다는 말 한 이후로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너무 힘들어졌는데 이상한 소리 안 할게요. 영국에서 자리 잡으려고 알아본 뒤에 이따금씩 찾아오는 그 아픔이 정말 너무 너무 너무 너무 괴로워요. 걔가 서울에 있는 거 같아서 계속 서울에서 대기 상태인 거 같아서 힘들었는데, 거기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어차피 다 진심이 아닌 거 같고 괜한 노력 하느라 에너지 빼는 거 같아서 너무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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