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니 돈 아까워할 것도 없다. 창원 가도 이 정도 호텔 값은 쓴다. 계속 영국치고 저렴한 데만 왔다. 지금 8-9일만 와도 되는 걸 2주 왔다고 후회하는데, 이래나 저래나 비행기 값은 똑같이 썼을 거 아닌가. 가계부를 보아하니 며칠 동안 하루에 10만 원 정도 썼다. 기차 타고 왔다 갔다를 안 했기 때문이다. 창원 가도 점심 먹고, 카페 가고, 배 타고, 저녁 먹으면 7만 원은 썼겠다. 맞다, 거긴 버스가 잘 안 다녀서 배차 간격 때문에 택시 타야 했었다. 10만 원 더 썼을 수도 있다. 창원 일주일 살기도 고려했었는데, 여기가 천 배 낫다.
오늘도 하늘이 강제로 쉬게 하는 느낌이다. 감사한 점은, 날씨가 무진장 좋다. 하루 종일 일기예보가 좋다. 그럼 그냥 호텔 방에서 바닷가 봐도 되고, 바로 앞 벤치에 앉아서 책 읽어도 된다. 처음 워딩 도착했을 때, 바닷가 냄새만으로도 너무 좋다고 했다.
힘들수록 감사해야 한다. 이 참에 감사 목록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1. 첫날 공연 '아직, 너를'
태어나서 겪은 가장 큰 무대 위 소름이었다. 처음 소름이란 걸 느낀 기억은, 2021년 인디 뮤직 페스티벌에서였다. 그런데 그땐 소름만 돋았지, 노래 영상 보면 노래는 마음에 안 들었다. 그 뒤론,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느꼈다. 그런 순간들이 너무나 가슴에 팍 박하기 때문에, 스무 번의 한 번도 소름 안 돋는 공연보다 그 한 번이 낫다.
2. 한국 돌아가서 하고 싶은 일로 도파민 뿜뿜
그 덕에, 박사 논문 주제를 'ADHD인이 무대 위에서 어떻게 집중력을 유지하나'로 해야 될 듯싶다. 한국 돌아가서 이걸 연구할 거다. 사실 이걸 박사 주제로 하고 싶다 하더라도, 석사 논문도 안 써봐서 뭘 어떻게 연구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외부 환경 요소를 다르게 해서 어떤 환경에서 제일 집중이 되는지 알아봐야 하는데, 대체 그 외부 환경을 어디서 구하나. 공연하고 싶다고, 내 맘대로 공연 환경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가능한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걸 제대로 연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게 중요하다. 박사 논문 주제에 필수 단어가 '무대, 보컬'이고, 선택 단어가 'ADHD, 신경 다양인, 정신 건강'임을 확실히 깨닫고 간다. 설령 결국 박사를 안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럴 가능성이 높지만), 그 프로포절을 쓰는 행위 자체가 기대가 된다. 나에 대해 알아가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다음 달에도 공연이 잡혀있다. 어떤 곡은 빡세게 연습하고, 어떤 곡은 연습을 안 한 다음에 무대에서 노래했을 때 집중도를 체크해본다든지 실험해볼 거다.
3. 영국엔 나에게 맞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알아서 감사하다.
한국엔 잡코리아를 아무리 뒤져도,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안 보였다. 한국은 직업 종류 자체가 한정적이다. 그런데 영국은 '내가 여기 살고자 하는 의지'만 확실하다면, 직업 공고만 봐도 가슴 뛰는 공고가 있다. 이 발견 자체가 감사하다. 안 그러면 '뭐 이렇게 다 싫냐.' 답답하기만 한데, '일단 원서 넣어보고 붙으면 그때 영국 갈지 말지 고민한다.' 생각하면 편하다. 붙고 나서 생각해도 안 늦는다.
4. 원피스 두 벌 얻었다
한국에선 아무리 찾아도 마음에 드는 원피스를 못 찾았다. 공연 의상으로 필요해서 두 벌 샀지만, 아무리 봐도 없는데 당장 필요해서 산 거지 마음에 쏙 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엔 그냥 가게 들어가서 하나 골라 입어보자마자 5초 만에 사겠다고 했다. 이게 한국에서 얼마나 절대 안 생기는 일인지 알아서, 감사하다. 그래서 한 7월부터 빨리 영국 가서 원피스 사 오고 싶었다. 이럴 줄 알았다.
5. 학교 갔던 러블리 데이
그토록 걱정했는데 새로운 커리어 컨설턴트와 만남도 좋았고, 학교에서 네 사람을 만났던 그날 자체가 좋았다.
6. 런던 맛집 발견
런던에 맛집 하나를 제대로 알아냈다. 그 파스타만 매주 먹고 싶다. 내일 아무리 힘이 없어도, 막판 전력을 다하여 저 캐리어를 끌고서라도 런던에 가서 한 번 더 먹을 것이다.
7. 그 외 감사함들
슬리데린 가디건 잃어버렸는데, 하나 다시 얻었다. 심지어 세일해서 가격도 괜찮았다. 라이프 드로잉 세션을 두 번 갔는데, 본머스에서 한 일 중에 제일 기억에 남을 거 같다. 미리 예약하고 온 것도 아니고, 본머스 와서 인터넷 검색해서 잘 찾았다. 런던에서 토토로 연극 본 것도, 마찬가지로 여기 와서 예약했는데 재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