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감정 인지 지연이라 해도

by 이가연

'아. 내가 역시 ADHD라서 컨트롤이 안 되어서...'라는 생각이 드는 건 참 이해가 되지만, 스스로 억울하게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가 도대체 그동안 친구를 어떻게 참아줬냐고 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영국인이어서 한국인과 다른 잣대를 들이밀고, 진작 작년 여름에 손절했어야하는데 안 한 부분들이 다 보였다. 이제야 다 보였다.


지금까지 한국 사람들과 다르게 얘만이 사과를 했다. 사과를 했다는 이유로 계속 품고 갔다. 그런데 사과를 하는 건 너무너무 당연한 일이다. 정말 슬픈 비유지만, 때려놓고 사과를 하면 뭐하나. 사과하고 또 때리고 사과하고 반복한 거다. 이건 정말 나쁜 사람을 만나기 전에, 필히 깨우쳤어야 할 일이었다.


그동안 너무 사과도 안 하는 사람들만 만나봐서, 사과에 감지덕지했던 거다. 'ADHD라서 컨트롤이 안 되어서 분노한 게 아니라' 비 ADHD인 중에는 진작에 그거보다 더 화냈을 사람도 많을 거 같다. 생각해 보니, 내 인내 레벨이 필요 이상으로 높았다. 자기 통제 욕구가 너무 강하다. 통제 안 되는 자기자신을 싫어하니까, 지나치게 통제하려고 든다.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참 높다. 비 ADHD인은 이성을 잃고 화낼 일이 없을 거 같은가. 내가 이성을 잃어본 경험은 아주아주아주 가끔이다. 이 친구에겐 이성을 잃지도 않고, 뭘 잘못했는지 알아듣게 잘 얘기했다. 상대방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들을 정도였으면, 그건 그냥 할 말을 잘 한 거다. 나는 대체 나에게 뭘 바랐던 걸까. 화도 안 내고, 분노도 안 하는 항상 평화로운 상태를 바랐나.


상대방이 뭘 잘못했는지 줄줄 읊은 경우는 절대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자책을 한다면, 나를 진작 아끼지 못한 잘못이 있다. 와다다 했다는 건 이번이 첫 잘못이 아니란 뜻이다. 지금까지 쌓이고 쌓인 거다.


한 가지 더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 화를 낸 뒤에,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나를 대해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됐다. 나는 그 순간만 괜찮은 것이다. 반드시 친구가 먼저 내 얼굴 봤을 때 사과를 했어야 한다. 내가 그냥 멀쩡해보인다고 넘어가면 안 됐다. 영국에서 그 순간엔 괜찮았을지 몰라도, 나는 그날도 그 다음날도 친구 얼굴도 못 쳐다봤다. 가만 생각하니, 쳐다보기 진짜 싫었던 거 같다. 비록 이미 우리의 우정은 끝났다며 메시지를 보냈지만, 배울 건 배워야 한다.


나는 종종 내 속마음을 모른다. 감정 인지가 늦다. 이건 전에 ADHD 영향임을 찾아봤다. 자극이 너무 많으니까, 자기 마음 들여다볼 여력이 없어서 늦게 아는 셈이다. 하물며 영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으니, 더 그랬을 거다.


하.. 걔 그거 기가 막히게 잘 발견했는데. 또 이 생각이 든다. 걔는 그냥 너무 똑똑해서 그걸 다 꿰뚫어봤고, 오빠는 그동안 워낙 많은 말을 줄줄이 해서 이제 잘 알아본다.


감정 인지를 제때 하려는 훈련보다는, 감정 인지가 늦더라도 어떻게 대처할 지가 더 중요한 거 같다. 이번에 잘했고 잘 배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안전함을 느끼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