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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 사랑

타이타닉, 걔 생각

by 이가연

1912년, 한국은 저렇게 침몰하는 배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구명 보트를 양보해서 여자가 압도적인 생존률을 보였을까. 보였겠냐?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된다. 남자라고 힘이 좋아서 헤엄쳐서 살아남고 나발이고 할 수 있는 바다가 아니었다. 바닷물이 너무 차서 5분이면 사람이 기절한다는데, 남자고 여자고 구명 보트 못 타면 죽는다. 보통 아내와 아이를 태우면, 본인도 같이 살아남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 아닌가. 그게 아니라 어떻게 얼굴도 모르는 다른 여자들을 먼저 태울 수가 있는가. 한국이었으면 1912년이 아니라 지금도 안 그럴 거 같다.

그러게. 거기 살 때 영국 남자 좀 만나지 그러셨어요.

캐리어 들어준다고 하니까, 내가 그런 호의를 받을 일이 잘 없어서 "어어어"하니 아주 그냥 상남자처럼 번쩍 들어서 옮기던 남자도 있었다.

뭐. 그건 걔도 그럴 거 같다. 하하하하하하하하

한 가지 또 든 생각이 있다. 그동안 '아니 나 걔랑 3개월 친구로 알고 지냈는데 이게 뭐냐.'싶을 때마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타이타닉도.. 이러면서 버텼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타이타닉이 10일에 출발해서 14일에 침몰했단 걸 알았다. 'love of my life'를 만났다고 확신하기에는 너무 빠르지 않나. 그 정도 시간에 확신하면 그것은 '외모' 아닙니까. 아무래도 조만간 영화를 봐야겠다.

마지막으로, 타이타닉 통계 홈페이지에 'Titanic Quotes'가 있었는데, 그 중 "이제 그는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는 영화 속 대사도 있었다.

걔 사진은 한 장 있는데, 목소리 데이터가 전혀 없다. 작년 8월에 휴대폰 복원하려고 갖은 시도를 했으나, 혼자선 다 실패하고, 업체 찾아보니 음성 녹음 복원 하나에 20만 원을 들여야해서 포기했다. 금방 올 줄 알았다. 돈 아깝게 될 줄 알았다. 그래서 작년 2월에 들은 내 기억으로 끝이다. 그때부터 올해 8월 중순까지,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상처 받았던 말이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올랐다. 드디어, 드디어 안 떠오른다고 해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종종 이 상황에서 걔가 뭐라고 했을지는 떠오른다. 내가 떠올린다. 예를 들어, 워딩에 숙소 잡은 거 혼자 투덜투덜하면서는, 걔가 소튼에 숙소 잡았어도 후회했을 거란 말을 했을 게 상상이 되었다. 문제는, 목소리 톤이나 분위기는 남아있는데, 점점 사투리 데이터가 흐려지는 기분이다. (그래서 추석에 마산에 어학 연수 가야 된다. 가서 사람들에게 말 걸고 다닐 거다.) 점점 내 머릿 속에 구현되는 말투가 '이거 맞아?'싶다.

그것으로 확실하다. 그 1년 반의 시간 동안, 왜 자꾸 상처 받았던 말들이 무한 반복되냐고 심장 아파서 죽을 거 같다고 했지만, 내 무의식이 원한 거다. 무의식이 그 말투를, 그 말들을 안 잊기를 너무 원해서다.

요즘은 의식적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이러다 잊어버릴 거 같아서. 아직도 난 마산 사투리 쓰는 20대 남자 100명 모아다가 목소리만 듣고 찾으라고 해도 찾을 거 같다. 목소리 톤 비슷해도 된다. 내가 심장이 쿵 떨어질 게 다르다. 사실 목소리도 필요 없고, 전화로 한숨 한 번만 쉬어도 알 거 같다.

센과 치히로냐. 돼지 중에 부모 찾기야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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