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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 사랑

니가 ESTJ인 이유

by 이가연

이 글은 뭔가, 당사자가 진짜 언젠가 볼 거 같아서, 이렇게 쓰는 게 맞는 거 같다는 육감(?)이 들어서 당사자에게 말하듯이 쓴다. 한 번도 이렇게 쓰고자 하는 충동이 든 적 없는데, 이 내용이 뭐라고, 신기하다.




잔소리 진짜 아빤 줄. 남들은 내가 타지에서 부모처럼 의지해서 그런 줄 아는데, 아니야. 우리 엄마도 아니고, 그냥 아빠를 갖다 박아놨어.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딸램짓을 한 게 아주 많더라고. 차치하고 ESTJ 설명에 들어가 보도록 하자.


1. 누가 고민 상담하면 상황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함

니는 그게 자동으로 된다고 했지. 니도 그게 싫다고 했지. 니의 그 ESTJ 면모하고 싸우지 마.


2. 시간 약속 철저함

나는 아직도 니가 늦는다고 하길래 몇 분이나 늦냐고 물어보니, 3분이라고 했을 때를 잊지를 못한다. 나의 두 ESTJ 부모는 나를 시간 약속, 규칙에 엄청 철저한 사람으로 키워서, 나도 정말 늦는 거 극혐하거든. 니 같은 또래를 본 적이 없어. 다 나를 그 문제로 빡치게 했어. 여자인 친구고, 애인이고 그 문제가 주 이슈라서 손절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나 몰라.


3. 고집 세고 이성적, 직설적임

나한테 "니는 좀 T로 해야 한다" 이랬거든. 정확한 워딩은 기억 안 나지만, 니가 원래 F인데 T로 굴게 된다는 뜻이었어. 마스킹이야. 너가 원래 다른 데 가서는 F로 마스킹하고 사는데, 내가 편하니까 T로 직설적이고 이성적이게 굴게 된 거야.


4. 다른 사람에게 칭찬, 인정받는 거 좋아함

원래는 '훗. 남자들 칭찬받는 거 좋아한다더니.'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야. 내가 남자를 구경도 못 하고 산 것도 아니고, 나도 남자들이랑 말해봤다. 니는 특히 인정 욕구가 높아 보였어. 그러니까 해외 석사까지 온 거겠지. 원래 ESTJ들이 성취 욕구가 높아서,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많아. 너도 분명 우리 아빠처럼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니 사업하기 시작하면 억대 수입 벌어들일 거야. 난 보여.


5. 분석적 + 실용적 + 직설적 예시

살면서 음악 업계 관계자가 아닌데, 그냥 내 노래 듣고 피드백을 막 던진 사람이 딱 둘인데, 그게 니랑 아빠야. 둘 다 공대 출신이지. 둘 다 평소에 노래를 좀 듣는 편이야. 이 사람들은 그냥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동 분석이 되니까, 내 노래를 듣고도 피드백이 막 나온 거지. 둘 다 공대 출신이라 사용하는 단어가 다 아마추어지만, 내가 찰떡 같이 알아듣고 적용했을 때 효과를 다 봤어. 그래서 신기했지.


6. 인간관계에서도 실용적임

나한테 "니랑 지내는 게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고 대놓고 얘길 했어. 그래서 내가 필요해야 비로소 날 찾겠거니 나도 생각했지. 그런데 마지막에 "내가 필요할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 했을 때 니가 죽어도 없다고 큰소리쳤으니, 번복하기 어렵지.


7. 공포 회피 방어기제

나는 예전 심리 상담을 통해서, 아빠가 공포 회피 방어 기제를 가지고 있단 걸 배웠지. 어쩌면 우리 집에서 가장 불안이 높은 사람일 수 있다고 하셨어. 상당히 새로운 접근이었어. 불안이 너무 높으니까, 그걸 직접적으로 느끼기를 엄청나게 회피하는 유형이지. 겉으로 보기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 거야. 너도 내가 울 때 한 번이라도 눈 하나 깜빡하는 걸 본 적이 없어. 아예 그냥 날 안 쳐다봤어. 사람이 그럴 수가 없거든. 사람은 스스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욕구가 있는데, 그걸 거스르는 행동이거든.


나도 이거 최면 이후로 혼자 이 세 명의 관계성을 들여다보며 알았어. 1년 반 걸렸어.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 반응하면 스스로 무너질까봐 두려워한 유형으로 보여. ESTJ의 강한 통제력, 그건 냉정함이 아니라 불안을 숨기기 위한 방어였어. 원래는 '진짜 싫은 사람하고 누가 마지막에 50분이나 통화하냐. 누가 내가 납득할 때까지 기다려주고 말해주냐.'까지 읽었지.


이건 내 자랑인데, 종종 너나 아빠보다 내가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있어. 나는 성숙한 방어 기제를 굉장히 잘 쓰거든. 이런 글도 그중 하나지. 생산적 활동으로 승화시키는 것.


8. 통제력 예시

나를 컨트롤했어. 나도 어지간히 쎈 사람이야. 어느 무당은 내가 교포나 외국인 남자만 만날 수 있다고 하고, 한국인은 나를 감당 못 한다고 하더라. 내가 봐도, 그동안 한달이고 만나온 남자들 내가 다 기를 죽여놓은 거 같애. 니 앞에서는 내가 말도 안 되는 모습을 보였어. 너 자체도 통제 성향을 보였고, 나도 거기에 흔들려서 따라갔단 말이지. 너 같은 사람은 다신 없을 거 같다. 그런데 이건 단순 통제력이 아니야. 헛소리하면 내가 죽여버린단 말이지. 두 사람 다, 미친듯이 똑똑해. 내가 인정하는 상위 1%야. 다른 데서 본 적이 없다.




이 사람들, 거대한 나무 같아서 어지간해선 끄떡없다. 나는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비바람에 다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는다. 흔들리긴 엄청 흔들린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애초에 흔들리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벼락 한 번 내리치면 팍 꺾인다. 강한 겉모습에 약한 모습이 진짜 깊숙이도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난 그걸 안다.


나는 내 노래 듣거나 글 보고 걔가 펑펑 울 거라는 생각이 그저 내 희망 사항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 한 번 이 모든 것이 팍 치면, 걔 진짜 팍 무너질 거 같은데 걱정도 되었다. 걔 상식 밖을 벗어났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 본인 분석으로 답이 안 나오면 잠을 못 잘 거다. '얘가 대체 왜 아직까지 나한테 그러지'에 대한 의문이 노래만 들어서는 안 풀릴 것이기 때문에, 친절하게 브런치 글로 남겨주는 셈이다. 누구는 돈 들여서 최면도 받았는데, 읽기만 하면 되니 이 얼마나 쉽...냐..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얘가 이런 글을 왜 남겼을지, 분석하고 배우려는 태도를 보이겠지.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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