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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 사랑

이대로 잘 살아야

251004 프리라이팅

by 이가연

드라마에 "당신은 내가 더 좋은 셰프가 되고 싶게 만들었어요. 당신이 먹지 않으면 내가 요리할 이유가 없게 됐죠." 라는 대사가 있었다. 아주 오글거리게도 바로바로 내 상황에 단어만 바꿔서 이입이 됐다. 굳이 말하지 않겠다.

"이제야 내 감정에 솔직할 수 있게 됐는데."라고 드라마에서 윤아는 후회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 후회는 안 하겠다. 당장 죽어도 그 후회는 없다. 내가 당장 목숨이 왔다 갔다 하면 그 후회는 저 짝이 하지 않을까. 나는 아주 잘 살았다.

현시대로 돌아온 윤아가 책만 끌어안고 있을 때 생각했다. 사진 한 장 없었으면 어떻게 버텼나. 아마 작년 여름에 휴대폰 복구를 했을 거다. 하늘이 안 그러게 한 데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괴로웠을 거다.

올해 내내 예술을 한 게 아니라, 그냥 보고 싶어서 발악을 했다. 근데 그 발악이 남들에게 좀 납득되고 설명되게 하려고 노력했다. 니가 아직 나이도 젊은데 너무 아깝다는 말에, "아니요. 이건 제 커리어인데요."하고 덮어 씌웠다.

원래 '내가 이상한 사람인 거 아닌가'하는 사람이 제일 정상이라 했다. 드라마 보면서 '내가 미친 거 아닌가' 계속 그랬으니, 정상이라 생각하겠다.

사우스햄튼이랑 마산이랑 다르다. 사우스햄튼은 내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고, 작년 여름 이후로 혼자 쌓은 추억도 이제 많이 묻었다. 이번에 갔을 때 깨달았다. 거기 간다고 걔 생각 안 난다. 내가 더 중심이다. 그런데 마산은 걔 아니었으면 창원중앙역이라는 역도 모르고 계속 살았을 거다. 며칠 전부터 너무 당장 가고 싶어서, 계속 기차표를 봤다. 오늘 공연 잡은 게 싫을 정도로 당장 가고 싶었다.

올해를 돌아보면 꼭 그럴 때 버틸 게 하나씩 주어졌다. 이번엔 드라마였고, 어쩔 땐 앨범 발매였고, 어쩔 땐 유튜브 쇼츠 올리는데 꽂히기도 했다. 아주 짧았지만 소개팅 다니며 재미를 봤던 때도 있었다. 아, 정말 이 모든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내가 다 만들어서 해야했다. 모든 활동이 걔랑 엮인다. 모든 활동이 괴로움을 버티기 위해서였던 것만 같다. 그 500대 1의 입시랑 비교해도 이게 훨씬 더 크다. 왜냐하면 적어도 과거의 다른 고난은, 하루 종일 하나만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문득 작년 10월에 지금 모습을 상상이라도 했을까...' 싶어졌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상상해 보자. 내년 10월에도 똑같을 수도 있다. 미래는 알 수가 없으니, 그냥 이대로 잘 살아가야 한다. 지금은 공연에 가는 길이다. 제발 최면에서 본 것처럼 내가 노래하는데 공연장 객석에 딱 앉아 있으면 안 되나. 유튜브와 브런치에 올리는 모든 공연에 그 생각을 너무도 간절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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