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이야기

고통스러운 기억, 여성장애인 피해자-그들은 그저 사랑에 고팠을 뿐인데..

by 마들렌

내가 처음으로 성폭력 피해자를 만난 것은 2008년 봄 즈음이었다.

NGO에 잠시 머무르면서 내 삶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을 무렵, 사무실에 봉사활동을 하러 온 여대생을 만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휴학생이었던 그 아이의 눈은 너무 어두웠고 너무 조용했다. 손이 빠르고 정확해서 우리가 요청하는 일을 잘해 내었던 그 아이는 말수가 거의 없었고, 칭찬에는 잠깐 스치듯 미소를 보였을 뿐 같이 있어도 대화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시간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잠깐 짬이 생기면 사무실 한쪽에서 담배를 피우며 창문 너머 보이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


그 아이가 성폭력피해로 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심한 충격에 빠졌었다.

설마 그 아이가!... 내 사무실 동료는 그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비밀로 하였다. 성[性]이라는 이야기가 음담패설이 아니고서는 함부로 이야깃거리로 삼기에는 조심스럽고 사적인 영역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특히나 상대방에게는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고통스러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

어느 겨울날 밤에 그 아이가 집에서 목을 매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심한 충격을 받았고, 너무너무 슬펐다.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상처였던 것이었다. 가까이에서 1년 여를 보냈는데도 내가 그 아이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한동안 망연자실하였다.




나는 내가 내가 가진 라이선스(license)를 제대로 활용해보려고 작은 도시에 있는 기관에 지원을 하였다. 내가 근무하게 된 기관은 그곳에서는 처음 생기는 기관이었고, 나도 참 생소했던 그런 기관이었다. 장애인복지를 하려고 찾아간 곳이었는데... 장애인은 맞는데 여성장애인 피해자들을 위한 비공개 보호시설이었다.


그곳에서 사무행정 및 회계, 상담 및 입소자 지원 업무를 담담하게 되었고,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던 터라 사실 나는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거의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지역사회에서 처음 생기는 비공개 시설이라 업무를 진행하면서 자주 관련 공무원들과 부딪히기도 하였다. 행정복지센터 담당 공무원은 업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고, 특히 비공개 시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였던 탓에 나는 입소자들의 안전과 기관을 위해 점점 싸움닭이 되어가야만 했다. 입소자들의 비밀전학과 서류 열람 금지 등 업무의 비밀보장과 긴급성에 대해 설명을 하였는데, 담당 공무원은 절차와 규정만 이야기하면서 선례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반려를 시키고 있으니, 일이 제대로 진행이 안될 수밖에...


나는 화가 난 채 사무실로 돌아와서 시청 담당 주무관에게 화풀이를 하였다. 그러면, 주무관이 상황에 대해 듣고는 행정복지센터와 중재를 해 주곤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담당 주무관은 참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일은 힘들었지만, 나름 보람이 있었고, 피해를 입고 기관에 입소한 장애인 아이들이 조금씩 안정을 찾고 웃음을 찾아가는 것을 보면서 참 기뻐했다. Befor & After 사진을 찍어서 아이들의 변화된 모습을 기록하였으며, 주무관청의 담당 부서에 업무에 관한 여러 가지 건의를 하고,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우리 기관의 지리적 위치는 지도의 가운데 정도라고 할까, 전국에서 오는 피해자가 입소하였다. 특히 다른 기관에서 꺼리는 대상자들이 입소하였다. 아이들의 입소 배경은 다양하였다. 이름도, 얼굴도, 나이도 다르고 피해내용도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사랑의 결핍'이었다.


10대 초중반부터 20대, 30대 연령대도 다양하였지만, 공통점은 '사랑의 결핍'이었고, 덧붙이자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피해를 입은 대상자의 가정은 대부분 장애인 부모 밑에서 방임되거나, 알코올 중독이 있는 부모와 살면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다가, 자신에게 조금만 관심을 보여주면,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가보다 하며, 마음도 주고, 몸도 주고, 가진 것 다 주는 것이 여성장애인 피해자들의 특성이었던 것이다.


뉴스에서 가끔 나오는 사건으로, 장애인 명의로 다수의 휴대폰이 개통이 되어있다고 나오는 데, 대부분 이런 피해의 한 유형이며 요금을 내지 못해 신용정보회사에서 압류통지서가 날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비장애인 남성이 (여성) 장애인을 속이고, 이용하고 등 처먹는 일이 피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나도 쉼터에 근무하면서 듣도 보도 못한 수많은 신용정보 회사로부터 날아오는 우편물을 받고 몹시 당황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이 아니라고 소명자료를 제출해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CCTV에 본인이 동행한 것이 맞다고 통화를 하며 확인하고는 화도 나고 어이가 없어서 속상해했던 적도 있었다.


지적장애인은 말 그대로 선천적으로 지능적 장애가 있어서 일상생활을 할 때에 타인의 보호와 지도가 일생동안 필요한 사람들이다. 정신장애인은 약물치료로 어느 정도 회복이 가능하지만, 지적장애인이나 발달장애인은 기능의 회복이 아닌 더 이상 퇴행하지 않도록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대상자의 특성을 이해하고 성폭력 피해로부터의 회복과 치유에 대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지적장애는 장애의 정도에 따라 중증인 1급부터 2급, 3급이 있는데, 3급의 피해자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 프로그램에 잘 참여하고 피드백이 주어지면, 알아듣고 이해가 어느 정도 가능하며, 치유 회복의 정도가 눈에 띄게 달라지지만, 중증인 1급은 어려움이 있다. 2급도 본인의 특성에 따라 훈련이 되기도 하지만, 3급과는 차이가 있었다.


장애인복지를 하다 보면, 탈시설화, 사회화,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목표로 삼기도 하며, 더 나아가 장애인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지역사회 통합'을 장애인복지의 최종 목표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이 참 불편하고 어렵다는 말을 대학원에서 장애인복지를 강의하시던 장애인 교수님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여성장애인 성폭력 상담원 교육을 들을 때에, 장애인 상담소 소장님이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강남에 사는 장애인이 피해를 입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맞는 말인 것 같다. 내가 만난 피해자들은 거의 대부분 저소득층 가정에서 방임 상태에 있던 아이들이었으니까. 배도 고팠고, 사랑에는 더욱 고픈... 그런 피해자들이었다.

그런 순진한 아이들에게 몹쓸 놈들이 음흉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기어이 불쌍한 아이들을 노리개로 삼았다. 시골 마을에서는 동네에 여성 장애인이 있으면, 속된 말로 '돌림빵'으로 삼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것이 신고가 들어가고 사건화 되면, 너도 나도 발뺌하다가 더 이상 빠져나갈 곳이 없게 되자, 공탁금을 걸어서 형량을 줄이려고 애를 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다수의 가해자로부터 피해를 입은 피해자 아이들은, 뒤늦게 경찰, 거주지 담당 공무원, 상담소, 아동보호 전문기관 등 다수의 기관이 개입하여 부모와 분리되어 보호시설로 보내지고 입소하게 된다. 입소할 때는 시선도 잘 맞추지 못하기도 하며, 삐딱하게 행동하고, 화도 버럭버럭 내고, 서로 싸우기도 하고, 자해를 하기도 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간다.

처음에는 쉼터의 규칙적인 생활이 힘들어서 나가고 싶다고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부모가 보고 싶어서 우는 아이도 있었다. 한 번은, 너를 이렇게 힘들게 하였는데도 보고 싶냐고 물어보니, 15살 그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말하였다.


엄마는 나를 지켜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엄마잖아요!

마음이 아팠다. 그래, 엄마였지.... 좋은 엄마였으면 더 좋았을 것을...

친족 성폭력 피해자는 가족에게 돌아가기가 어려웠다. 어떤 경우는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내쳐지는 경우도 있었다. 집안의 남자 어른이나, 오빠로 부터 피해를 입은 경우, 아이는 죄인이 되거나, 집안 망신을 시키는 '나쁜 년'으로 매도되기 일쑤였다. 그 아이 잘못도 아닌데...


친부로부터 성폭력피해를 입고 분리가 되어, 처음에는 말도 잘하지 못하던 아이가 특수학교로 전학을 하고 난 뒤, 감추어져 있던 운동신경이 체육선생의 눈에 띄게 된 케이스가 있었다. 훈련을 통하여 대표선수로 발탁되더니 장애인 올림픽에도 나가게 된 것이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지적장애 3급이었던 이 아이가 한날은 운동이 너무 힘들다며 어깨가 축 쳐진 모습으로 하교하였다.

"너 포기할 거야?" 하고 물으니, "포기? 가 뭐예요? 배추김치?"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박장대소했다. 한편으로는 '포기'라는 단어가 이 아이에게는 어려운 단어였구나, 이 아이는 여태까지 살면서 '포기'라는 단어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만두고 싶어?라고 고쳐서 물으니, '아니요'라고 하던 그 아이가 기어코 해낸 것이었다.


가족들로부터 내쳐져서 마음 한 구석엔 커다란 구멍이 생겼겠지만, 그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조금씩 꿈을 꾸게 된 것 같다.

나는 기억한다.

겁에 질려 있던 아이의 눈동자가 어느덧 빛을 내며 반짝이기 시작한 것을, 기쁨에 차 있는 것을...


이전 03화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