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기쁨과 슬픔을 주고 간 아이들
사회복지사로 중증장애인들과 여러 해 동안 생활했던 적이 있었다.
요양원과 재활원에서 장애인들과 살면서 사실 그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내게 직업을 묻는 어떤 사람들은, '사회복지사'라고 하면, 조금은 애처로운 눈으로,
"좋은 일 하십니다."
라고 말을 하곤 하였는데, 사실 나는 그 말이 듣기 싫었다. 사회복지사를 전문직으로 보기보다는 자원봉사자 즈음으로 치부해버리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완벽주의자였으며, 결벽증을 가지고 있어서 엄청 깔끔 병(?)을 떨었었는데... 아이들과 살면서... 이런 것들은 산산조각이 나듯 무너지고 깨어져 버렸다.
완벽주의? 결벽증? 글쎄 이런 것들은 도무지 통하지 않는 아이들이었고, 단어의 의미를 재정립해야 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곳, 땅 신인 터줏대감과 친한 것 같았다. 흙을 집어 먹어도 아프지 않았고, 맨발로 데크와 연결된 산 언저리를 뛰어다녀도 다치지 않았다. 여름 햇살 가득 비치는 어느 날 아침, 비 온 다음날 지렁이가 온 데크(deck)를 가득 채우고 있어도 아이들은 잘 밟고 다녔다! 사실 나는 그게 지렁이인 줄도 몰랐다.
내가 맡은 방에는 7살 먹은 사내아이와 큰 녀석들(20대 중반)만 5~6명이 있었다. 장애 1급으로 대화는 할 수 없었으며, 신변처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아이들로 식사도 보조를 해 주어야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내 기준에서는 아이들이지만, 분명히 말하면 20대가 넘었고, 덩치는 내키를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녀석들을 잘 리드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남자 생활인 방>이라고 해서 엄청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입사하기 전날 꿈에 내가 들었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동안 마음속에 부담감을 떨쳐버릴 수가 있었다.
"네가 사내아이라고 차별하느냐? 사내 아이든 여자아이든 내게는 소중한 아이들이다!"
하며 엄하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톨릭 신자이다. 어떤 힘에 이끌려 세례를 받았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나름 고군분투하느라 아픈 기억도 몇 개 가지고 있다. 이런 체험으로 인해서 나는 더욱더 열심히 아이들을 보살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아무리 더워도 팬티스타킹을 신어야 한다', '맨발은 여성의 정조관념과 연결되어 있으니 양말은 꼭 신어야 한다' 등 나름의 신념일 수도 있고, 굴레일 수도 있는 규칙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이들과 살면서 나는 '내가 변해야지 아이들이 안전하고 편하겠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런 거추장스러운 규칙을 버리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오니 난리가 났다! 공동구역인 넓은 원형 거실에 까만 바나나 풋이 수도 없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점심을 먹고 온 나와 몇몇 교사들은 기겁할 뻔하였고,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었다. 거실에서 놀고 있는 생활인들의 발을 일일이 살펴보다가 드디어 그 범인이 내 담당인 녀석으로 드러났다. 나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다.
'이 놈이, 기어코...' 까만 피부에 눈이 동그랗고 거울보기를 좋아하여, 수선화 방의 대표 주자라 불리던 그놈이 바로 범인이었다.
"선생님이 닦으셔야 해요. 어떻게 해요! 저희는 이만..."
나는 그날 큰아들 때문에 점심 먹고 온 기운을 온통 거실 닦는데 쏟아내야 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ㅎㅎㅎ...
유독 걷기 싫어하는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는 모두가 죽을 거라고 하던 아인데, 몇 년째 죽지 않고 살고 있다.
중증장애인 기관에 근무하면서 들었고, 보아온 경험으로 중증장애인은 오래 살지 못한다고 알고 있다. 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면역성이 비장애인과 비교할 바가 못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27살의 마른 체격에 키만 멀대같이 큰 놈이었다. 눈이 깡마른 얼굴의 거의 반을 차지한다고 느낄 정도로 휑하니 컸고, 얼굴에 여드름 같은 것이 송송 나 있었다. 이 아이를 오랫동안 보아 온 영양사 선생님은 좋은 것만 있으면 들고 와서 몰래라도 먹이게 했다.
이 녀석은 맨날 누워만 있고 싶어 하였고, 걷기도 귀찮아서 엉덩이를 끌고 다니던 아이였지만, 이런 꼴을 가만 두고 볼 내가 아니었다. 물리치료사 선생과 의논하여 워커(walker, 보행보조기구)를 가지고 와서 시간마다 일으켜 세우고 넓은 홀을 걷게 하였다. 처음엔 싫은 내색을 엄청 하였지만, 엄하고 일관성 있는 엄마의 훈육에 마지못해 순응하였고, 몇 달이 지나자 종아리에 근육이 생길 정도가 되어서, 서 있는 시간도 꽤 길어졌다. 그럴 때면, 나는 그 아이의 얼굴에 부비부비 하거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내가 재활원으로 발령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고가 들려왔다. 내가 이뻐하였던 그 아이가 별이 되어... 더 이상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보냈던 정이 있어서 보호자로 빈소를 지켰다. 여리디 여린, 연약하기 짝이 없던 내 아이의 빈소는 초라했다. 가족도 버린 아이였는데, 무엇을 기대했던지... 조문객이라곤 요양원과 재활원에서 같이 지냈던 아이들과 직원 선생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후 몇 달 뒤, 나도 교통사고 후유증과 건강문제로 퇴사를 하면서 그 아이는 내 기억에서 잊히는 듯하였다. 퇴사 후에도 나의 몸은 너무도 상해서 5분을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힘겨웠고, 치료에도 차도를 보이지 않아서 나는 깊은 실의에 빠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하며 몹시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꿈에 환한 빛과 함께 이 아이가 방문을 스르르 열면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키가 큰 청년의 모습이 아니었고 5~6살 정도의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흰 상의에 멜빵 반바지를 입은 단정한 모습으로 사뿐사뿐 내게로 걸어왔다. 아이의 머리카락은 보드랍게 나풀거렸고 조용히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그 얼굴은 분명 내가 알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아이는 부드럽게 나를 껴안으며, 내 등을 토닥여 주는 것이 아닌가! 그 따뜻함이 내게로 전달되어 나는 꿈속에서도 엉엉 울었고, 꿈에서 깨어나서도 한참 동안 울었다.
'이 아이는 내가 자기를 사랑했던 것을 알고 있었구나!'
나도 처음엔 몰랐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아이의 매력에 풍덩 빠져들어서, 다른 놈들 몰래 더 아껴주었다. 나는 나의 진심이 그 아이에게 전달된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내가 제대로 한 게 맞는구나' 하며, 나는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그 뒤에도 힘든 일이 생길 마다, 그 아이의 모습을 떠 올리게 되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 14~15).
이런 모습을 보게 되니, 성경구절의 의미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되새겨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