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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doseeker Feb 13. 2019

새벽의 여신, 오로라를 찾아서

핀란드 로바니에미로 떠나다

몇 년 전, 20대의 마지막을 장식하겠다며 오로라를 보겠다고 노르웨이의 북쪽으로 도망치듯 날아갔었고, 6년 전에는 그저 호기심에 가득 차 헬싱키에서 야간열차를 달려 이곳 로바니에미에 당도했었다. 숨을 내쉬면 폐가 얼어붙을 것만 같은 북극의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이곳이지만, 그 추위를 감내하게 할 만큼의 무언가가 확실하게 존재한다.



로바니에미는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북쪽의 라플란드에 속한 소도시다. 유럽의 흔한 아기자기한 소도시와 같은 매력은 그다지 찾아보기 힘들지만, 겨울의 로바니에미는 거리고 건물이고 도로고 온통 새하얗게 표백되어 마치 동화 속 겨울 왕국에 온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물론, 그런 환상은 북유럽의 살인적인 물가가 금새 산산조각 내버리고 만다. 우리는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된 식사는 꿈도 꾸지 못하고, 게스트 하우스 인근의 대형 슈퍼마켓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냉동 피자와 냉동 파스타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로바니에미를 방문하는 여행자라면 가장 먼저 신경쓰는 것은 날씨일 것이다. 아무리 태양이 열심히 힘을 써서 흑점이 대폭발해 오로라 지수가 엄청나게 높아지더라도, 눈이나 비가 오거나 구름이 가득 하늘을 메우고 있다면 말짱 도로묵이니까. 우리는 딱히 날씨를 신경써서 일정을 조정할 만큼 여유는 없었기에 전부 운에 맡겨놓고 떠나오긴 했지만, 로바니에미에 도착한 첫 날, 눈이 온다는 예보를 뒤집고 맑게 갠 하늘이 우리를 반겼고, 우리는 그 길로 인포메이션 센터로 달려가 오로라 헌팅 프로그램을 예약했다.

겨울의 유럽이란 늘상 눈이 오거나 비, 흐린 하늘로 점철되기에(유럽 사람들은 Missing Sun 이라고 종종 이야기 한다.) 오로라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 먼 곳까지 날이와서 일주일 넘게 머물러도 날씨가(혹은 태양이) 따라주지 않아 빈 손으로 쓸쓸히 돌아갔다는 슬픈 사연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마치 단단히 화가 나 만나주지 않는 애인의 집 앞까지 찾아갔지만 비까지 쫄딱 맞고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일 것이다.



프로그램을 예약하고 시간이 남아 로바니에미 시내를 잠시 둘러보았다. 6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온통 하얗게 모든 건물이 덮인 모습, 인포 센터 앞의 온도와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탑, 순록과 연어고기 요리를 파는 레스토랑들. 단지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중국인들이 굉장히 많아졌다는 것. (심지어 큼지막하고 새빨간 중국 식당도 생겼다.) 이들이 로바니에미의 경제를 견인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로바니에미는 웬만한 구경거리가 모두 모여있기 때문에 걸어서라도 충분히 돌아다닐 수 있다. 볼만한 랜드마크라고 한다면, 핀란드에서 가장 긴 강으로 알려진 '오우나스요키' 강변의 '잇칸쿤띨라' 다리 정도다. 강도 역시 새하얗게 단단히 얼어붙어 그 위로 스노모빌들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강을 구경하다 너무 추워 이내 숙소로 돌아와 몸을 녹이는 수밖에 없었다. 라플란드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 길고 어두운 겨울을 견디는 걸까. 태양은 마치 게으른 동물처럼 느즈막이 일어나 얼마 깨있지도 못하고 다시 일찍 잠에 든다. 그마저도 힘겹게 지상에서 얼마 떠오르지 못하고 간신히 공중에 매달려 있다 다시 서쪽으로 서둘러 사라지고 만다. 이 계절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는 듯이.


오로라 헌팅은 해가 지고 난 늦은 저녁에 출발했다. 돈을 더 지불하면 방한과 방수가 되는 점프수트와 장화를 빌릴 수 있었다. 물론 우리는 몸으로 떼웠지만.

사람들을 실은 대형 버스 두 대는 도시의 불빛을 피해 라플란드의 깊은 숲 속으로 한참을 달려 어느 얼어붙은 거대한 호숫가에서 멈추었다. 호숫가엔 불빛이라곤 버스의 헤드라이트와 사람들이 손에 든 스마트폰의 하얀 불빛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칠흑같은 어둠과 정적만이 흘렀다.


하늘을 찌를듯 솟은 소나무들을 지나 도착한, 하얀 눈이 이불처럼 덮은 호수 위에사 우리는 쏟아질 듯한 수많은 별들과 옅은 초록빛으로 흔들거리는 오로라와 조우했다.



밤의 장막을 걷어내고 아침을 불러오는 새벽의 여신 에오스(Eos). 로마 신화에서는 아우로라(Aurora)라고 불렀고, 캄캄한 밤하늘에 춤추는 빛의 장막을 그녀의 옷깃이라 여겼다. 여러 고전에서는 그녀를 룩스프리마(Lux prima), 하루의 처음 빛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어둠을 물러나게 하고, 빛을 밝히는 재탄생을 의미한다. 태양과 달처럼 밝지는 않을지라도, 이 새벽의 여신이 춤추기에 밤이 물러나고 비로소 아침이 오는 것이다.



추위에 몸이 벌벌 떨리는 것도 잊은 채 우리는 호수 위에서 그 신령스러운 빛의 장막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녹빛의 춤이 너무나도 황홀해서, 이대로 저 빛무리와 함께 하늘 저 편으로 사라져 영원히 춤을 출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로라를 만난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 순간을 앞으로도 몇 번이고 마주한다 해도 나는 언제까지나 그녀를 그리워 할 것이 틀림없다.



고개를 쳐들고 있느라 목이 아파올 때 쯤, 우리는 손발이 얼어 동동거리며 모닥불가로 가서 가이드들이 준비해준 소지시와 마시멜로, 뜨거운 차를 정신없이 뱃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나서 모닥불과 호숫가를 수없이 왔다갔다 하며 조금이라도 더 그 빛의 장막을 기억 속에 박제하려 애썼다. 운전기사인 구스타보는 우리에게 무척 운이 좋다고 말했다. 날씨가 좋은 것도, 하늘에 오로라가 이렇게 오랫동안 나타나는 일 모두가 흔치 않다며.


모두가 곤히 잠든 돌아가는 버스에서 여전히 추위에 몸서리 치고 있던 나는 동행한 여자친구에게, "이렇게 추운 곳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살 생각을 했을까?" 라고 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손을 비비며 이내 대답했다.



"오로라와 바보같은 사랑에 빠져버린 사람들이었을거야. 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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