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몇 년 전부터 인연을 맺게 되어 지금까지 일본을 중심으로 흥미로운 예술 프로젝트를 함께 해 온 인페인터글로벌의 지원으로 작년 <숲 속 갤러리 프로젝트>에서 잠시 들렀던 일본 아키타 뉴토온천향의 온천 중 하나인 <쓰루노유>에서 이 주 간 머물며 창작활동을 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필자는 지금(2019년 4월 15일) 쓰루노유 온천장의 고즈넉한 오두막에서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를 선명하게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쓰루노유 온천(鶴の湯温泉)의 역사는 무려 16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먼 옛날 상처 입은 학이 온천탕에 들어가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을 본 사냥꾼이 쓰루노유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쓰루’는 일본어로 학이라는 뜻이다. 이 유서 깊은 온천장은 오랜 시간을 거쳐 오며 조금씩 변하기는 했지만, 원형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해서 이어져왔다. 온천장의 음식들은 주변 숲 속에서 직접 채취한 건강한 식재료들로 정성껏 만들어지고, 오래 전부터 남녀가 함께 써 왔던 혼탕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아키타로 향하는 비행기는 일 년에 몇 번 정도 전세기로 직항편이 뜨는 경우뿐이어서, 도쿄를 경유해 국내선으로 갈아타거나 신칸센을 타고 가야만 한다. 덕분에 나는 새벽잠이 덜 깬 채로 비행기를 타고 도쿄를 거쳐 센다이 공항으로 들어간 다음, 거기서 다시 택시를 타고 깊고 깊은 아키타의 숲 속으로 떠나는 여정을 치렀다. 마침 우리나라에는 벚꽃이 여기저기에서 만개하고 있는 타이밍이었기 때문에, 내심 일본으로 가면 더 만연한 봄을 만끽할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을 했지만 아키타 센다이 공항으로 천천히 하강하는 비행기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산등성이에는 여전히 흰 눈이 고집스럽게 덮여있었고, 산봉우리들은 무슨 유행처럼 하나 같이 하얀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한술 더 떠서, 택시를 타고 쓰루노유가 위치한 뉴토온천향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나뭇잎 보다 눈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도로 양 옆으로 웬만한 성인 보다 큰 높이로 눈이 벽처럼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택시는 그 거대한 눈의 장벽 사이로 난 구불거리는 산길을 아슬아슬하게 한참이나 달렸다.
쓰루노유에서 나를 맞이해준 이토상-인페인터글로벌의 직원으로 쓰루노유에 상주하고 있다-은 지난주에도 눈이 펑펑 왔다며 이제야 좀 살만해 진거라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겸연쩍게 “4월 중순이면 여기도 꽃도 피고 따뜻할 줄 알았어요.”라고 하자, 이토상도 약간 당황한 것처럼 대답했다. “제가 고향이 아키타인데, 아키타에서도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동네는 저도 처음이에요.”
쓰루노유에는 원래 찻집으로 쓰다가 폐쇄하고 몇 년 간 비워두었던 건물이 있었는데, 인페인터글로벌에서 최근 이곳을 갤러리 카페와 작가가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인 <a,house>로 변신시킨 덕분에 내가 도착하기 전날 까지도 다른 작가님이 꽤 길게 머물다 떠나셨다. 갤러리 카페로 변하기 전에 한 번 왔을 때도 마치 고즈넉한 산장 같은 따듯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이제는 거기에 작가들의 작업으로 공간이 가득 메워져 깊은 숲 속의 숨겨진 미술관에 방문한 듯 한 감상마저 들게 했다.
잠시 숨을 돌리자 이제 막 상하기 시작한 계란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온천의 유황 성분 덕분이다. 이제 나는 이 주 간 온몸에서 계란 냄새를 풍길 테다. 내가 머물 숙소는 온천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머무는 목조로 된 작은 방이었는데, 바닥과 벽, 천장 할 것 없이 모두 나무로 되어 있어서, 자리를 펴고 앉아있으면 은은하게 나무 향기가 느껴졌다. 거기에 온천수가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졸졸졸 들려오는 건 덤. 그러나 그 분위기에 경종을 울릴만한 엄청난 복병이 있었으니..
-내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