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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doseeker Mar 22. 2020

지극히 개인적인 인용문

환장할 우리 가족 - 홍주현 (문예출판사)

                                                                           

대한민국의 모순적이고 불합리한 가족구조에 대한 일침을 가하는 책. 


<밀리의 서재>로 작년 말쯤 읽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당연하게 자행되는 억압과 간섭, 차별, 개인에 대한 월권 등


책 전체의 내용 자체가 내가 살아오고, 경험한 것들에 심히 공감되어 보다 많은 사람들(특히 부모님)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던 책.











여기서 내가 상대에게 맞출 줄 아는 방법이란 ‘나’를 버리고 온통 가족을 위해 희생하라는 의미가 아닐 테다. 내가 존중받고 싶은 만큼 상대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아량을 베풀면서 그릇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리라. 상대에게 맞추기 위해 나를 버리고 희생하는 태도라면 싸울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를 양보하지 않은 채 ‘너’를 존중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하면 갈등과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싸우기 위한 싸움이 상대를 나나 집단에 맞추도록 만들기 위한 폭력이라면, 이해를 위한 건강한 싸움이란 서로 상대를 너로 만들려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의 다툼은 나를 버리지 않으면서 상대를 나만큼 존중하고 인정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2019-09-05 14:29:12







이런 절제 없이 하는 지적은 선배나 부모 입장에서는 조언과 충고지만, 후배나 자녀 입장에서는 간섭이다. 이 간섭은 옷이나 먹는 것 같은 사소한 잔소리로, 귀찮은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후배나 자녀에게 이런 조언과 충고는 ‘경험할 기회’를 가로막는 권리 박탈이 된다. 내가 선택한 것이 부모(선배)의 마음에 바람직하지 않을 때마다 그것보다 이것이 좋다는 선의의 조언과 충고를 하고, 자녀(후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가 해봐서 안 다며 강요하는 건 심하게 말하면 폭력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2019-09-05 13:25:29







이 힘을 사회적 관점에서 말하면, ‘거리 두기’다. 철학자 이진우는 “도시 속에서 독립적 개인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식”으로 ‘거리 두기’를 제안하면서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크 지멜의 말을 빌려, 오밀조밀 복작복작하며 살아가야 하는 대도시만큼 “개인 상호 사이 유보와 무관심이 더 필요한 곳도 없다”56고 강조한다. 이런 ‘거리 두기’, 즉 유보와 무관심이란 자기만의 선의로 상대를 위해주고 싶은 충동을 절제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19-09-05 13:25:17







철학자이자 아들러 심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기시미 이치로는 자녀 양육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중성 과제’라는 개념을 설명한다.55 중성 과제란 공동체(즉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일은 아니지만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이다. 예를 들어 숙제를 하지 않거나, 방을 어지르고 치우지 않거나, 게임에 빠졌거나, 늦잠을 자는 것 등 그 피해가 당사자에게 국한된 일이다. 그는 중성 과제에는 아무리 부모라도 함부로 개입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2019-09-05 13:24:35







근대사회는 아이처럼 미숙한 존재라도 그 자체로 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본다.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고,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개인’으로 성장할 때 아동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근대 이후에 탄생한 아동의 권리 개념은 이런 시각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서구 사회가 장애인이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처럼 부모는 자녀가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개인’이 되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그동안 아이의 삶에 참여할 자격을 부여받았다고 보는 것이다.


2019-09-05 13:22:10







개인주의를 의도한 애덤 스미스가 지향하는 바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개인’으로서 연대하는 모습이다. 이는 그의 노동 분업 주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혼자 완제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여럿이 역할을 나눠서 제품을 완성하는 분업 생산은 결국 서로 의지해야 살아갈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가는 방식이다. 의지는 의존과 다르다. 애초부터 누군가가 없으면 일어서지 못하는 상태, 누군가의 선의가 있어야 자기 욕구를 해결할 수 있어 서로 의존하는 상태는 그 관계가 평등하지 않다.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자의 문제 해결은 보살피는 자의 관심과 배려, 양보에 달렸다. 보살피는 자의 삶 역시 상대의 복종과 순종, 충성에 달렸다.
반면 모두가 스스로 자기실현을 할 의지와 책임이 있는 상태는 평등한 관계다. 각자 자기 능력과 의지에 따라 역할을 맡고, 그에 대한 책임을 다하면 된다. 이런 사람이 개인이고, 개인이 협력하는 상태가 연대다. 이렇게 연대로 형성한 것이 공동체다. 따라서 연대와 공동체는


2019-09-05 13:14:23







앞서 얘기했듯이 한국 사회에서는 ‘정상’이 아닌 건 전부 ‘비정상’이다. 가족에 대해서 보면 이성 부모와 이성 자녀로 구성된 4인 가족이 정상이고, 그 나머지 형태는 전부 비정상이다. 저출산이 문제가 되자 아이가 하나라도 있으면 애국자로 칭송받는 것이지, 과거엔 3인 가족도 비정상이었다. 형제 없이 자라면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느니, 사회성이 떨어진다느니, 지금 보면 혀를 찰 편견이 과거엔 얼마나 정상으로 여겨졌는가.
나는 요즘 결혼을 거부하는 풍토이니, 아이가 없어도 결혼한 이성 부부 2인 가족이 반쯤은 정상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착각이었다. 한국에서 아이 없이 둘이 사는 부부는 비정상일 뿐만 아니라, 천인공노할 매국노다. 수조 원을 쏟아부어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저출산 현상의 주범이 바로 나 같은 사람들이다. 2006년 이후 지금까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80조 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했다는데 별 효과가 없고, 최근에는 신혼부부와 산모, 아이 등에게 또다시 대대적인 세금을 투입하게 만드니 저출산 현상을 심각하게 보는 이들은 나 같은 사람이 얼마나 원망스럽겠는가.


2019-09-05 10:50:01







과거에는 배우자와 자식이라는 가족(‘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살아갈 수 있었다면, 이제는 의지할지언정 의존할 대상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존재, 즉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근대의 신인류 ‘개인’이다. 결혼을 선택이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한국에 이제야 비로소 근대적 ‘개인’이 등장한 신호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2019-09-05 10:41:47







이런 결정은 겉보기에 자기 선택 같아도 타율적인 선택에 가깝다. 살면서 느끼고 생각하고 달라지는 내적 자아실현보다는 그저 육체를 유지하고 안락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고민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결정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살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 결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결합에는 일종의 사슬이나 족쇄처럼 구성원을 인위적으로 결속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결혼이 그런 타율적 구속의 역할을 한 것이다.


2019-09-05 10:38:47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가 또 다른 사회 구성원으로 혜택을 받고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사회가 규정한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 들어가는 게 맞다. 그렇다면 결혼은 부부보다 아이를 위한 제도다. 부부를 위해서 꼭 결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근대국가 개념을 만들고 민주 체제로 변한 사회구조에 맞춰 가족 개념을 다시 규정한 근대 사상가들 역시 부부의 결합이 갖는 근대적 의미를 찾는 일에서는 봉건시대 가족의 목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19-09-05 10:34:31







심리학자 에드워드 L. 데시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매슬로가 말한 다섯 가지 욕구 외에 꼭 충족해야 할 세 가지 욕구가 더 있다. 메타인지라고 하는 자기 능력을 알고자 하는 욕구, 자율성 욕구, 관계 욕구다. 이 세 가지는 행복감에 중요한 요소다. 나는 결혼으로 남편을 통해 관계 욕구를 충족했을 뿐만 아니라 내 깜냥을 자각해서 메타인지 욕구를 충족했고, 당당해져서 자율성 욕구를 충족했다.
그렇다고 해도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관계는 삶을 배우기 위해서 필요한 장치에 불과하며, 살아가는 이유, 살면서 배우고 깨달아야 할 내용도 사람마다 다르다. 꼭 혼인 관계가 아니라도 각자 다양한 관계에서 자기 깜냥만큼 성장할 것이다. 나 역시 아이가 없어 부모 자식 관계를 맺지 못하는 처지이니, 자신이나 타인에게 통념에 맞는 관계를 전부 맺어야 한다고 강권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지 않을 거면 왜 결혼해요?” 친구를 만난 자리에 동석한 청년이 물었다. 그는 나보다 열 살 어렸다. 내가 결혼할 때만 해도 결혼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불과 10여 년 만에 완전히 달라진 세태에 놀라워하는 대화 가운데 받은 질문이다. 그 청년은 9년 사귄 애인이 있지만, 결혼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결혼이란 제도에 의구심이 있었다. 


2019-09-05 10:32:19







유교의 예절처럼 타인만 강조하다 보니 그 경계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개인’이 소멸된 ‘우리’ 안에서 사생활은 가족 집단의 것이 되어 자기 발견과 자기표현의 활동을 존중하지 못하는 것일 테다. 그러니 각자 자기를 지키기 위해 상대에게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태도가 나오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사생활의 폐쇄성과 배타성은 존중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그 자체의 성격은 아니다. 내 사생활이 충분히 존중받는다면 굳이 감추려고 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2019-09-05 10:18:51







하지만 그것이 자아도취적 만족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라면 가족이라고 해서 나 아닌 사람을 구속하거나 지배하려는 시도가 있을 수 없다. 진짜 사랑은 자율성 보장의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어떤 이유에서든 폭력이나 억압은 사랑과 공존할 수 없다. 사회가 그런 관계나 공간을 존중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한국인은 사생활 보호를 떠올릴 때 흔히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태도와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다. 아마 타인이나 사생활 존중을 그저 유교적 도덕 개념의 예절과 비슷하게 타율적으로 주입받은 나머지, 상대의 사생활을 제대로 존중하지 못하고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곧잘 침범해서가 아닐까 한다. 사생활이란 자기 발견과 자기표현의 활동이다. 따라서 사생활 존중은 나 자신에 대한 존중에서 출발한다.


2019-09-05 10:15:53







엄밀히 말해서 가족은 사생활을 공유하는 관계고 집이나 가정은 그 공유가 구체적으로 이뤄지는 공간이지, 가족이나 그 영역의 성격을 오직 사적인 것으로 규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만약 가족이나 그 영역이 온전히 사적인 것이라면 가족 구성원은 사적인 개인이 될 수 없다. 가족을 하나의 사적인 것으로 뭉뚱그려 인식하면 ‘개인’이 존재할 자리를 찾기 어렵다. ‘나’라는 개인, 사적 존재는 그저 가족이라는 한 덩어리로 소멸되고, 사회라는 공적 영역을 형성한 사적 존재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 집단이 된다.


2019-09-05 10:11:56







프롬이 말하는 ‘바라지 않음’은 ‘다름’과 관련한 태도에 가깝다. 나와 같기를 ‘바라지 않고’, 나와 ‘다른’ 성격이나 생각, 취향, 욕구, 삶의 방식 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다. 가족 구성원이 스스로 존엄해지는 건 ‘다름’을 서로 존중할 때25라는 리처드 세넷의 지적을 고려해도 그렇다.


2019-09-04 13:06:47







자녀나 가족을 사랑하는 이유가 나와 비슷해서,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혹은 내 아이(가족)이기 때문이라면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말 그대로 상대에게서 발견되는 ‘나’를 사랑하는 자아도취적 만족감에 가까운 것 아닐까. 나와 같아서, 내 가족이라서 사랑하는 자아도취적 만족감에 젖은 사람으로 구성된 가족은 공동체가 아니라 한 집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반면 나와 다르고 이해하기 어려운데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사랑이 아닐까. 가족은 그렇게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각자 독자성을 갖출 때 비로소 집단이 아니라 연대하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2019-09-04 13:06:32







결국 어른 말에 고분고분하게 따르기를 바라는 건 자아도취적 만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일뿐인 것 아닐까. 아이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아이가 ‘우리’ 밖으로 나가도록 문을 활짝 열어둬야 하는 것 아닐까.
가족에 대한 진짜 사랑은 절절한 ‘우리’로 똘똘 뭉치는 게 아니라, 각자 자기의 날개를 가진 온전한 ‘너’로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도록 서로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9-09-04 13:00:14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아이를 낳는 일이나 결혼을 결정하는 일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이를 책임지는 사람은 당사자다. 가문(집단)의 흥망성쇠에 자기(개인) 삶이 결정되는 과거와 달리, 오직 당사자가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책임질 수 있다. 아무리 부모라도 아이가 있는 가족을 만들든 다른 어떤 배우자와 어떤 가족을 만들든 그에 따른 기쁨이나 고통을 대신 부담할 수 없는 구조 아닌가. 따라서 오늘날 부모가 실질적으로 해줄 수 있는 건 ‘결정’이나 ‘동의’가 아니라, ‘조언’이라는 매우 소극적인 역할뿐이다. 신체발부수지부모가 유용하던 시대와 오늘날 부모의 권한은 사뭇 다른 것이다.


2019-09-03 13:4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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